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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까지 옭아맨 국보법... '한울회 사건' 당사자를 만나다

'씨알사상가' 박재순 박사의 삶... 한울회 사건의 진실규명 결정을 기다리며

등록 2022.12.12 16:14수정 2022.12.2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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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박재순 앞줄 우측 2번째 ⓒ 박재순

 
[기사 수정: 12월 26일 오전 10시] 

박재순, 그는 1950년 논산에서 태어났고 네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그의 어린 시절 가정형편은 꽤 유족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가 일곱 살 때 그의 아버지는 많은 논밭을 팔고 대전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는 당시에 대전에서 하나뿐인 3층집 건물을 샀는데, 금융사기를 당하고 사업마저 실패하면서 2년만에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다. 재산을 잃고 건강마저 잃은 아버지는 그가 아홉살 때 돌아가셨다. 그래도 모친과 누님이 계셔서 어렵다고 하더라도 아주 밥을 못 먹을 정도의 생활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셔서 누님은 대전여중을 다니다가 3학년 때 한 학기를 남겨놓고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누님과 동생들도 공부를 잘했지만 생활고로 아래 동생 둘은 고등학교만 나왔고 나중에야 아래 여동생과 막내여동생은 대학까지 나올 수 있었다. 그가 아홉살 때 부친이 돌아가시고 그는 가족과 함께 고향인 논산군 광석면으로 이사 갔고 2년 동안 왕전초등학교를 다녔다.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토지도 없었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생계를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아 다시 대전으로 나왔고 아버지 없는 가정의 생계를 지원하는 모자원에서 일곱 식구가 단칸방에서 2년 정도 살았다. 모자원에서 그는 학교 공부에 힘썼고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많은 동화책과 교양서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아홉살 때 기독교 신앙을 접해 종교적으로 깊이 몰입했다. 비록 어릴 때지만 4시 반 새벽예배 참석할 정도로 열심이었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다. 한밭중학교를 거쳐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되니 그는 "앞으로 뭘 하고 살까?"를 고민했다. 중고등학교 때 신앙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는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자. 기독교 신앙에 평생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하지만 막상 대학전공을 선택하려 하자, 자신이 목회활동에는 적합하지 않고 사상과 철학을 전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70년 서울대 철학과에 지원하고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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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박재순 앞줄 우측 4번째 ⓒ 박재순

 
대학 다닐 때 그는 기독교 학생운동과 성경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러던 중 1970년 11월 13일 서울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48-1970)이 근로기준법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항거 자살한 사건은 그저 '공부벌레'였던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전태일 죽음이후 그를 포함한 서울대학생들은 민주화운동과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반정부 시위가 대학캠퍼스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점차 그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서울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거나 시국선언문 등이 나오면 유인물을 모아서 대전에 갈 때 마다 대전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대전 친구들과 만나 시국문제에 관한 공부모임을 했다. 그러다가 1974년 3월 박정희 정권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관련자들을 정부 전복기도 혐의로 구속·기소한 학생운동권 탄압사건인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그는 서울대를 마치고 학사편입 한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대학 학생이었다. 평소 그의 활동을 달갑지 않게 보던 경찰들은, 서울신학대학 도서관에서 공부중인 그를 어느 날 갑자기 대전경찰서로 끌고 갔단다.

대전에서 그가 주도하던 시국에 대한 공부모임이 문제가 된 것이었다. 그는 충남대공분실에 의해 대전 시내 모처에서 감금된 상태에서 보름이상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모진 구타를 당하며 고된 조사를 받았다. 형사들은 주먹으로 얼굴이나 그의 뺨을 수시로 때리고 발로 차며 "북한에서 자금을 얼마나 받았나? 북한 누구랑 연결 됐나?"고 다그쳤다. 그가 "북한에서 돈이나 지시를 받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하자 형사들은 "그러면 국내 누구 끄나풀이냐? 배후를 대라 이 새끼야"라고 매를 때리며 추궁했다.

당시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있었는데 그의 옆옆방에 인혁당사건으로 사형당한 하재완(1932-1975)이 있었다. 위층에는 김지하(1941-2022), 김경남(서울법대졸업 후 한신대 학사편입, 1949-2019), 황인성(1953-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교도소에서 폭력과 욕설을 동반한 고문조사를 받았다. 그 후 민간인 신분임에도 군법회의에서 기소유예를 받고 결국 5개월 만인 1974년 8월 8일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함석헌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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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박재순 우측 4번째 ⓒ 박재순

 
석방된 후 그는 "서울신학대학은 보수적이라서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오니까 계속 못 다니겠더라."며 그해 가을 한신대학교로 적을 옮겼다. 한신대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면서 그는 신체적으로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새로운 지식과 정신의 세계를 열어가야 했다.

한편 1973년 3월, 그가 서울대 철학과 4학년 시절 한 친구의 안내로 그는 서울 원효로의 함석헌(1901-1989)의 집을 방문했고 이때부터 함석헌은 그의 평생스승이 된다. 그때부터 그는 함석헌이 이끄는 여러 공부모임에 열심히 출석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사건으로 갑자기 몇 달 동안 못 나오다가 오랜만에 함석헌의 공부모임에 나갔다. 그러자 공부모임이 끝나고 함석헌이 그에게 "그동안 어디 갔었소?"라고 물었다.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있었습니다."라고 답변했고 같이 안에 있던 김지하 등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한편 그가 한신대에 입학하고 1년쯤 지나서인 1975년 가을 민중신학자 안병무(1922-1996)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한신대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그는 1979년 한신대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80년 1월부터 안병무가 세운 서울 용두동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실장으로 일하게 된다.

석사학위를 받기 전인 1976년 4월경 그는 큰 척추수술을 받아야 했다. 어린시절 소아마비 때문에 다리만 불편해진 게 아니라 척추가 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서울대 병원에서 척추수술을 하고 두 달을 머물러야 해야 했다. 퇴원 후에도 그는 깁스를 하고 열 달 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서 지내야 했다. 당시 가족들이 자신을 뒷바라지하느라 말할 수 없이 큰 고생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 한국신학연구소 일을 하며 그는 1년 남짓 동안 안병무로부터 많이 배웠다.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문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사상적으로 통틀어 뛰어난 분이었기 때문에...." 당시 안병무는 해직교수로 10명 내외 한국신학연구소 연구원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연구한 민중 신학에 대해 정기적으로 강의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울회 사건', 혐의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그러다가 이른바 '한울회사건'이 터졌다. 한울회사건은 기독교청소년 30여명이 1979년 12월 30일부터 3일간 열린 수양회에서 이규호(1958-2021)가 본인의 충남대 사학과 졸업논문인 <현대의 공동체론>에서 맑스의 공산사회에 대해 짧게 언급한 것이 전두환 군부정권의 꼬투리가 된 공안사건이었다. 이규호의 논문을 근거로 전두환 정권은 한울회가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며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관련자들을 구속 수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1981년 3월 23일, 전두환 취임 직후, 박재순은 대전경찰서의 호출을 받고 서대전서로 갔다. 점심때쯤 서대전서에 도착했는데 경찰들은 그를 하루 종일 대기시켰다. 그러다가 저녁 9시쯤 깜깜해지자 건장한 형사 두 명이 와서 그를 검은 승용차에 태웠다. 이들은 그의 양 옆에 타고, 차가 움직이자 검은 천으로 그의 눈을 가렸다.

도착한 음침한 곳에서 그는 보름정도 심한 매를 맞으며 고문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처음 8일 정도는 아예 잠을 못 자게 했고 밥도 제대로 안 주었단다. 형사들은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때리고 뺨을 수시로 갈겼다. 너무 피곤해서 비몽사몽간 조사를 받으며 그냥 아무데나 쓰러져 자면 형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온몸을 축구공 차듯이 가차 없이 발로 찼다. 그리고는 그에게 소리쳤다, "너는 잠잘 자격이 없어 이 새끼야!"

하루는 형사들이 그렇지 않아도 불편한 그의 다리에 병을 끼우고 무릎을 꿇렸다. "북한의 지령을 받았느냐, 배후가 누구냐?"는 등의 질문과 함께 구타와 욕설이 동반됐다. 이후 그는 대전 보문사 아래 충남도경 지하 대공분실로 옮겨졌다. 대공분실 조사실엔 몽둥이와 각종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고, 벽 곳곳에 피 튀긴 자국이 선명했다. 이곳에서도 그에게 가혹한 구타와 욕설을 동반한 모진 조사가 한 달 간 이어졌다.

당시 그와 함께 조사를 받던 김아무개씨는 "조사 중 너무 고통스럽고 모욕적으로 해서 자살기도를 세 번이나 했다. 수사 과정에서의 모멸감, 또 하지 않은 것을 했다고 인정하는 자술서를 쓰고 지문을 찍고 나와서 드는 무력감, 나의 양심과 신앙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 때문이었다"고 나중에 재판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이런 고문조사를 거쳐 조작된 그의 혐의가 만들어졌다. '국군 폐지'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계엄법 위반, '한울회'라는 반국가단체를 구성했다는 내용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그는 1,2심에서 모두 유죄를 받았다. 당시 1심 판사는 한때 대통령후보였던 이인제(1948- )였단다. 반면 대법원은 '한울회는 반국가단체가 아닌 신앙을 바탕으로 한 신앙공동체'라고 보고, 일부 혐의에 대한 무죄취지로 파기환송을 했다. 그러나 다시 공을 넘겨받은 2심은 별다른 새로운 증거도 없이 전과 같이 유죄판결을 내렸고, 2차 대법원 판결에서도 대법관 전원일치로 유죄를 확정했다. 당시 대법관 중엔 나중에 대통령후보가 된 이회창(1935- )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약 2년 반의 감옥살이를 하고 1983년 8월 15일 그는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석방된 후에도 그는 한울회사건으로 함께 수감되었던 친구들과 애틋한 생각을 갖고 자주 통화하고 만났다. 그러나 당시 또 다른 피해자였던 고등학생들과는 혹시라도 그들이 상처를 받을까봐 우려되어 40년이 다된 최근까지 거의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학생들이 겪은 고초들을 짐작은 했지만, 구체적으로 들은 것은 불과 얼마 전이 처음이어서 굉장히 놀랐고 미안했다. 내 아픔보다 더 아프고 생생하게 다가왔다"며 제자들에게 오히려 미안해했다.

당시 피해 고등학생이었던 아무개는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시 박재순 선생님 등을 뵐 면목이 없었다. 지금도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분들인데 당시 (제가) 어린 나이에 경찰의 욕설과 고문 그리고 강압적 분위기 때문에 제가 허위조서를 쓰고 재판에서도 정확한 증언을 하지 못했던 것이 너무 죄송했다. 저와 친구들은 당시 한울회사건으로 학교에서 정학되었고 선생님은 물론 집안과도 갈등이 생겼다. 요즘에서야 서로 그때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당시 고등학생)들은 그 이후로 계속 혼란을 겪고 죄책감 때문에 많이 방황했었다."

내가 박재순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1980년대 중반 서울퀘이커모임의 여름수련회에서였다. 당시 그는 '씨알사상과 민중신학'이라는 주제로 열강을 했다. 그리고 지난 2002년부터 2007년까지 그는 함석헌기념사업회 부설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 나는 초대총무로 우리는 손발이 너무도 잘 맞게 일했다. 요즘의 감회를 묻는 질문에 그는 윤석열 대통령을 겨냥해 이렇게 말했다.

"검사하던 사람이 대통령까지 되고 나서 정치권,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에 무슨 일이 있으면 그저 압수수색이나 하고 공권력에 의존하려 하는듯해 그게 좀 안타깝다. 나 같은 사람들이 당했던 한울회 사건이 대표적으로 공권력 과잉적용이고 국민에 대한 지나친 법적처단이라고 생각한다. (윤 정부가) 공권력과 법적용 영역을 축소시키고, 국민주권에 기반한 자율적인 영역을 확장했으면 한다.

한편 한울회 사건과 관련해서는 심지어 어린 고등학생들조차 고문해서 허위날조 시킨 부분이 사회적인 공론화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는 10여년 전까지는 두 다리로 걸었다. 하지만 10여 년 전 겨울 공개강연 후 귀가길 찬 대리석 바닥에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고, 그 후 수술을 했지만 다리 관절이 굳어져서 이제는 목발을 짚고 겨우 걷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지난해 진실화해위원회에 한울회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을 했다. 그 후 진실화해위에서 조사개시 결정이 났고 3-4개월 전 진실화해위에서 그를 포함 한울회 사건 관련자들을 조사했으며, 1년 후에나 조사가 매듭 지어질 것이라고 했단다.

한편 그는 최근 2기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뉴라이트 계열인사로 내정된 것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현했다. 윤 대통령이 지난 9일 진실화해위 위원장에 김광동 현 상임위원을 임명했는데, 그는 지난 2월 국민의힘 추천으로 들어왔으며 제주 4.3의 피해자를 탓하는 듯한 논문과 주장을 펼쳐오는 등 '뉴라이트' 활동으로 논란이 됐던 바 있기 때문이다(관련 기사: 진실화해위원장된 극우 인사, 지난해 그가 방명록에 남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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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박재순 박사 ⓒ 박재순

 
* 위 글은 지난 11월 11일 박재순 박사댁에서 필자와의 면담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 박재순 박사는 1950년 충남 논산 출생. 서울대 철학과 졸업. 한신대 신학과 졸업(신학박사1992). 한국신학연구소 번역실장. 민청학련사건과 한울회사건으로 옥고(1974.3-1974.8), (1981.3-1983.8). 한신대 연구교수. 성공회대 겸임교수. 씨알사상연구회 초대회장(2002-2007). 씨알재단 상임이사(2007-2014). 저서: '다석 유영모', '씨알사상','함석헌의 정신과 철학', '애기애타: 안창호의 삶과 사상', 애국가 작사자 도산 안창호', '도산철학과 씨알철학' 등. 
#박재순 #진실화해위 #국보법 #고문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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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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