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말랭이로 먹을 건 껍질을 깎아 십자로 쪼개 말리고, 곶감용은 찬바람 불 때 고리에 매달아 말려서 12월에 먹는다.
이종명
도시에서의 삶은 시골을, 시골에서의 삶은 도시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그래서 도시와 시골의 삶을 모두 누리며 살기 위해 5도 2촌, 4도 3촌이라는 말도 생겨났고, 꽤 많은 사람이 그런 삶을 살기도 한다. 나는 일주일 내내 시골에 살지만, 시골에서도 주중과 주말이 조금 다르다.
주중에는 기간제로 직장을 다니고, 주말엔 농사를 짓는다. 주말 농사도 사계절의 양상이 다르다. 이른 봄과 가을에는 주로 채집과 수렵을 한다면, 여름엔 시간 날 때마다 풀베기가 주업이다. 겨울의 농사일은 한가한 편이라 농사가 아닌 돌둑쌓기·집수리·나무베기·눈쓸기 등을 한다.
올해도 감나무에는 감이 누렇게 익어가고, 밤나무는 알밤이 벌어져 떨어진다. 또다시 나는 유목농의 삶을 시작한다. 주말을 맞아 할 일을 머릿속에 새기고, 일할 때 필요한 장비를 자동차에 실어둔다. 내일 해야 할 일은 밤줍기, 감따기, 다래따기, 도토리줍기다. 은행줍기도 하는데 그건 한 달 뒤에 하는 것이 좋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을 만큼 수확하는 게 유목농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밤나무는 지천에 널려 있다. 관건은 밤의 크기와 병해다. 소위 말하는 산밤은 알이 작아서 콩알만 하기에 콩밤이라고도 부른다. 콩밤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맘만 먹으면 한 가마니는 주울 수 있을 만큼 흔하다. 산밤 중에도 알이 굵은 것이 더러 있는데 이런 것들은 약을 치지 않다 보니 벌레가 많이 먹는다.
밤 속에 파고들어 먹고사는 벌레 이름은 무엇일까? 밤벌레? 밤나무에 많이 보이는 벌레 중에는 밤바구미와 복숭아 명나방이라는 벌레가 있다. 밤바구미는 풋밤일 때 긴 주둥이로 구멍을 뚫고 알을 낳아 놓기에 밤에 작은 구멍도 잘 보이지 않고 티 나지 않게 속을 다 파먹는다. 그에 비해 복숭아 명나방이란 녀석은 밤에 구멍을 내고 지저분하게 밤의 속살과 자신의 배설물을 묻혀 놓아 쉽게 구분이 된다.
감이 익는 속도를 보면서 주말 작업용 밤나무를 정해 놓았다가 토요일 새벽에 작전에 돌입한다. 해가 뜨기도 전에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장대와 장대끝 갈고리 주머리를 챙기고, 들통, 콘티박스, 광주리, 장화, 쓰레기 줍는 집게, 스패치, 모기 진드기 기피제 등을 챙기고 집을 나선다. 굵은 밤이 익어서 밤톨이 중간쯤 벌어진 밤나무 아래 도착해서 장대를 연결하고 갈고리를 달아 5m쯤 높이의 밤을 턴다.
후두둑~ 후두둑~ 떨어지는 밤송이와 알밤을 보면서 이런 소리에 주변의 뱀이 굴속으로 도망치길 바라본다(밤나무밭에는 웬 뱀이 그리도 많은지...). 밤이 다 떨어지면 집게를 들고 풀숲이나 돌 밑이나 밤이 보이는 대로 주워 담는다. 1시간 만에 거의 바구니 한 통을 가득 채운다.
다음은 감을 따러 간다. 밤을 따는 곳에서 불과 100m 이내에 감나무 서너 그루가 자라고 있다. 산감은 관리가 되지 않아 감나무까지 접근하려면 온갖 가시덩굴과 풀숲을 헤치고 가야 한다. 감나무에 도착해서도 아주 높이 매달려 있기에 누구나 쉽게 따기는 어렵다. 멀리서 보면 가을에 무슨 노란 꽃이 핀 듯이 주렁주렁 열렸는데, 우리가 사서 먹는 감들보다 알이 작다.
감말랭이로 먹을 건 한로(10월 초) 즈음에 따서 껍질을 깎아 십자로 쪼개 말리고, 곶감용은 상강(10월 말) 즈음에 따서 찬바람 불 때 고리에 매달아 말려서 12월에 먹는다. 감 또한 장대에 갈고리 주머리를 연결해서 5~6m 높이까지 딸 수 있다. 그런데 감따기는 밤과 달리 흔들어 딸 수가 없기에 한두 개씩 잡아 따고 내리고를 반복해야 한다.
장대를 세로로 들어 올려 끌어내리는 건 수월한데, 낭창낭창한 장대를 수평으로 멀리 따려고 하면 손목에서부터 가슴근육까지 딱딱하게 굳어지며 뻐근해지기도 한다. 어쨌거나 두서너 시간 고생하면 백 수십 개의 감을 딸 수 있다.
오전 간식을 먹고 오후엔 다래따기랑 도토리줍기다. 다래는 자동차를 타고, 미리 보아놓았던 장소로 이동하면서 딴다. 야생 다래는 10그루 중에 한두 그루만이 열매가 달리는 암다래라서 다래가 달린 놈을 찾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수컷 선호사상이 있는 건지 아무짝에 쓸모없는 수다래는 왜 이리 많은 건가?
다래는 덩굴 식물로 봄에는 수액을 먹을 수 있고, 수액을 먹은 뒤에는 다래순을 따서 무쳐 먹고, 가을에는 다래열매를 먹을 수 있는 아주 소중한 나무다. 또 넝쿨이라 자기 스스로는 높게 자라지 못하지만, 옆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타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높게 올라가면서 달리다 보니 열매를 쉽게 딸 수 없다. 나도 5m 장대를 가지고 따려고 하지만, 아랫부분의 몇 개 정도나 딸뿐 위에 주렁주렁 열린 건 어찌할 수가 없다. 그런 건 그저 익어 떨어지면 하나씩 주워 먹는 게 정답이다.
한 해에 다래는 딱 필요한 만큼만 구하는데 주 용도는 술을 담는 데 쓴다. 5L짜리 담금병에 다래 1/3 정도를 넣고 소주 25도를 거의 5L 쏟아부어 놓으면 그 다음 해에 아주 깨끗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다래주가 된다. 다른 용도 하나는 아내가 다래를 좋아하니 한 보름 정도 매일 조금씩 주워 먹을 양이 필요하다. 다행히 올해는 멀리 돌아다니지 않고 서너 그루에서 먹을 만큼 땄다.
마지막은 도토리줍기다. 우리나라 참나무에서 달리는 도토리는 6형제가 있는데, 그중에 상수리나무에서 열리는 도토리를 으뜸으로 친다. 상수리나무 군락 아래에 가서 굵고 실한 도토리를 한 통 주워왔다. 도토리를 주워오고, 10월 말 은행줍기까지 끝나면 유목민의 가을도 끝이 난다.
농사를 지으면서 경작을 늘리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농업혁명의 덫(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참고)에서 벗어나, 직접 농사를 짓지 않고도 먹을 만큼만 채집할 수 있는 풍요로운 유목민의 삶. 내겐 이 가을이 오래된 과거를 느끼게 하는 행복한 시절이다.
추가 : 감말랭이를 만들고자 아내와 몇 시간 동안 감을 두 박스나 깎아 널었다. 또 도토리묵을 만든다고 들통으로 한가득 되는 도토리를 말리고 물에 불리고 믹서기에 갈아 앙금을 만들기 위해 물에 담가 놓았다. 그런데 그 후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왔더니 비가 오면서 모두 곰팡이가 펴 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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