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압사 참사가 발생한 지 열흘이 지난 7일 오전 서울 용산구 이태원역 1번 출구에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자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며 두고 간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가 놓여있다.
유성호
저 스스로를 속여왔습니다
1.
선생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오랜만입니다.
늘 '선생님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었는데, 안녕이라는 단어가 낯설 정도로 저는 사실 그간 안녕하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재글을 쓰고 펜을 내려놓은 지 4주 차에 접어들었어요. 4주간 저는 꽁꽁 숨어 저 스스로를 보호하느라 바빴습니다.
아마도 이 글을 가까운 친구들이 읽으면 멀쩡했는데 왜 저러느냐고 다소 의아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냐면 저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에 돌아온 것처럼 그들을 잘도 속였습니다. 그리고 저 스스로도 잘 속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사 이후 한 달이 거진 다 돼 가던 즈음에는, 왠지 모르게 내가 계속 힘들어하면 안 될 거 같다는 강박이 생겨버렸습니다. 친구들에게 '내가 얼마나 힘드냐면' 하고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더 하게 된다면 아마 그들을 잃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중생활을 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 메시지를 하고, 개그 짤을 보내거나 '오늘 뭐 먹었는데 맛있었더라' '이거 너무 웃기지 않니' 하며 시시콜콜한 잡담을 서로 주고받았고, 그렇게 친구들을 안심시키고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낮의 생활은 그럭저럭 할 만 했어요. 바깥 구경도 하고, 일도 열심히 했고, 친구들과 대화도 나눴고. 재미있는 것도 보면서 집중할 대상이 있을 때는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귀가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지요.
선생님, 밤은 왜 이렇게 긴 걸까요. 밤이 너무 길어요. 밤이 너무너무 길어서, 두렵고 무섭습니다.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안정제와 잠을 잘 수 있는 약을 복용한 지 3주가 넘었지만, 사실 약이 몸에 받지 않았습니다.
약을 먹어도 잠을 자지 못하고, 약을 먹어도 심장이 빠르게 뛰어 항상 온몸이 긴장 상태인 것이 느껴지며, 손과 발에는 늘 땀이 흥건하게 나서 양말을 두 개씩 챙겨 다닐 정도였어요. 그리고 이명이 심해졌지요.
이때 느낀 바는 딱 하나, 약도 통하지 않는구나. 나의 고통이 약의 효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너무 컸습니다. 약도 통하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을 수는 있을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까. 약에 대한 기대마저 사라져버린 나는, 그렇게 스스로 약을 먹는 일을 중단했습니다.
2.
얼마 전 이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작가 : "초롱님 안녕하세요. OOO방송국의 OOO 프로그램 작가입니다. 이번 주 일요일 보도 예정이라 인터뷰 일정이 촉박해서, 늦은 밤이지만, 이번 주 인터뷰 가능하신지 여쭤봅니다."
나 : "안녕하세요 김초롱입니다.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감이 안 와서... 내용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작가 : "선생님께서 연재하시는 글에 심리치료를 받은 경험이 녹아있었는데, 치료를 받으면서 느꼈던 점들,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에게 심리치료가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지 등등 치료의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합니다. 얼굴 나오는 것 원치 않으시면 안 나오게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나 : "너무 도와드리고 싶은데, 지금 언론 인터뷰 요청과 기고하는 글이 많아서 조금 힘든 상태입니다. 그리고 일요일 방송 전에 스케줄도 어려울 듯도 하고요. 내일부터는 예정된 치료와 상담 일정을 해야 하는 스케줄이 많습니다."
작가 : "네, 요즘 많이 바쁘실 것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저희 기사에서 가장 많은 분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실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인터뷰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희가 내일이나 금요일 편하신 장소와 시간에 맞춰 짧게 10분 정도만 인터뷰 진행하는 것도 혹시 힘드실까요? 편하신 장소로 찾아뵙겠습니다."
나 : "네. 어떤 말씀인지 너무 알지만, 제가 조금 힘드네요. 언론 노출이 너무 많은 것이 현재로서 제게 칼이 돼 돌아올까 무서운 마음이 더 큽니다. 지금 제게는 저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때인 것 같아요. 서면 인터뷰 정도는 해볼 수 있겠으나, 오디오나 영상 인터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다면 그때 만나 뵙겠습니다."
그다음 날 그녀는 서면 인터뷰는 인터뷰 전달력이 떨어져서, 10분 정도만 할애해서 인터뷰를 해달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다음 날 아침, 그녀는 다시 한 번 인터뷰 요청을 했습니다. 아주 짧게, 성가시지 않게 금방 처리할 테니 제발 인터뷰에 응해달라는 문자였습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문자를 보고 다시 연락드립니다. 누군가를 취재원으로 다루고 싶을 때는 조금 더 천천히 접근하고 다가와 주셔야 합니다... 작가님의 요청을 문자로 읽으면, '일요일에 보도가 잡혀 있어서 취재를 빨리 해야 하고, 그걸 응해줬으면 좋겠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저를 위하는 게 아니라, 보도가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의도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시겠지만,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받아들이기에 그렇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용기 내어 힘겹게 하나씩 수락하는 이유는, 기자분들과 피디분들이 저보다 더 미안해하며 본인들이 죄인인 것처럼 정성스럽게, 아주 조심히 다가와 주시는 모습이 마음을 울렸기 때문이에요. 저 또한 '저 죄 없는 분들이 내가 뭐라고 저렇게 머리를 숙여 요청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에, 용기 내어 그분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이런 식의 접근과 요청은 저를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무례하다는 생각까지 듭니다."
저는 이 문자를 답장으로 보내고, 이내 곧 후회를 했습니다. 사과 전화를 한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앳되었고, 짐작건대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인 스무살 초반의 사회 초년생 같았어요. 저 또한 방송 일을 해온 터라 막내작가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너그럽게 대해줘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내가 왜 우는 것일까. 모난 말을 타인에게 한 것이 되려 내게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참사가 내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겪지 않았을 텐데' 하는 전체적인 후회와, 자괴감, 과거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졌습니다.
제가 왜 이러는 걸까요
3.
약도 먹지 않고, 선생님도 찾아가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하며 나를 혹사시켰습니다.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증으로 손발이 다 땀으로 축축히 젖어갈 정도였지만, 잠은 겨우 하루에 두 시간 남짓, 그것도 반은 의식이 깨어있는 상태로 자는 둥 마는 둥.
월드컵이 시작됐고, 월드컵 기운에 열심히 친구들 곁에서 응원도 하고 소리도 지르며 한껏 신나 보이는 듯한 2주를 보냈습니다.
'2002년생인 아이가, 2002년 월드컵도 못보고 그에 버금가게 재밌는 올해 월드컵도
못 봤네요. 우리 아이는 월드컵을 두 번 다 못 봤네요. 올해는 정말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희생자 부모님의 이야기를 전해듣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주변에게 드러내지 않고, 그저 친구들에게 기댔습니다.
몇몇 친구들이 2박 3일간 우리 집에서 같이 자주던 날, 저는 너무 편안하게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주말을 보냈지요. 일요일 밤까지 자고 간다던 친구가 갑자기 '그냥 집에 가봐야겠다'며 집에 갈 채비를 하는데,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배신감과 서러움, 서운함, 원망이 동시에 들기 시작했어요.
아주 유치한 어린애가 입이 툭 내밀고 시위를 하듯, 온갖 퉁명스러움과 짜증을 친구에게 다 내다가 '가지마, 응? 안 간다고 그랬잖아. 월요일에 간다며' 하고 붙잡기도 했고요.
선생님, 제가 정말 이런 애가 아니었거든요. 이런 내 모습이 몹시 당황스러웠고, 심지어 친구들이 떠나자 밤새도록 펑펑 울었습니다.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린 아이가 울듯이 끄억끄억 거리며 울었어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20년지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해줬어요.
'초롱아, 친구들이 널 버린 게 아니야. 그냥 모두 집에 돌아간 것뿐이야. 널 버린 게 아니야 그냥 집에 갔어. 괜찮아 친구들은 언제든 또 올 거야. 왜냐하면 버린 게 아니라 집에 간 거니까. 울어도 돼 괜찮아.'
버린 게 아니라 집에 돌아간 것 뿐이라는 말, 아직도, 여전히 가슴 속에서 울렁입니다.
그 사과가 어쩐지 슬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