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재앙에 깊은 슬픔을 느끼다

[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서광범과의 작별

등록 2023.01.13 11:41수정 2023.01.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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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1884년 11월 1일 시작된 나의 조선 탐사기행은 44일 만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거창한 행렬을 이루어 호기있게 출발했던 여행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지요. 그 새에 조선은 격랑 속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나는 지난 여행을 회상하면서, 그리고 시련에 처한 내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면서 12월 15일 꼭두새벽에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렇게 나의 두 번째 조선 여행은 끝이 났다. 다채롭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며 근심 걱정으로 점철된  900마일의 여정이었다. 나는 속속들이 조선인으로서 생활했다. 기독교인의 영혼을 지닌 채. 그 여정에서 그토록 넓고 깊게 내가 보았던 조선의 실상은 일찍이 누구도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이런 기회를 제게 주신 하나님, 저를 더 지켜 주옵소서. 한낱 거품 같은 세상의 명리에 끌리지 않고 오직 진실된 삶을 살게 하소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속물적인 육체적인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님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믿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에서 제가 헛된 명예와 권세를 탐하지 않고 신앙을 지킬 수만 있다면, 주님은 저에게 전혀 다른 행복을 주실 것임을!"


갑신정변은 참담하고 비극적인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청나라를 섬기는 보수파들을 척결하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세력은 이제 궤멸되고 말았습니다.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그리고 서재필을 비롯한 일본 군사학교 출신들이 주역이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가까운 사이였고 특히 서광범과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자주 만났습니다.

10월 말경 내가 곧 떠날 여행 준비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서광범이 나의 집을 찾아 왔습니다. 그는 무언가 입을 열려고 하다가 불한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밖으로 나가자고 제안했습니다.


내 집에 같이 살고 있는 일본인 요리사와 하인들의 귀를 의식하고 있음을 직감하고 나는 말없이 일어섰습니다. 우리는 청계천 수표교를 걸었습니다. 그때 서광범은 조선이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강조하면서 거사 계획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나는 처음엔 잠자코 듣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친청사대파 여섯 내지 일곱을 처단해야 할 것 같다고 격정적으로 말하는 소리를 듣고서 너무 놀랐습니다. 나는 그의 생각을 반박하면서 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하느냐면서 화를 냈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즈음 자신들의 거사에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습니다. 김옥균도 푸트 공사에게 지원을 호소한 적이 있었지만 푸트 공사는 간곡히 만류했습니다. 그날 서광범도 나의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그들과 마음이 통했지만 폭력적인 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내가 서광범에게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말하자 그의 눈은 깊은 절망감으로 물들었습니다. 그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군요. "그럼 잘 다녀 오십시오.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여행을 떠나가 하루 전날 밤에는 홍영식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의 여행 계획이 확고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말없이 발길을 돌렸습니다. 내가 다음 날 집을 떠날 때 그들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어쩜 나를 배려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얼마 후 갑신정변으로 역적으로 몰리게 될 그들이 나의 여행를 배웅했더라면... 나는 꼼짝없이 역적으로 지목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가족과 함께 살해당하거나 국외로 망명했습니다.

민중은 진보 개화파들을 조선을 유린하는 왜놈들과 한패로 여겨 증오하였습니다. 그들과 가깝게 지냈던 나의 신변이 매우 위험해진 까닭이 그러했습니다. 더구나 조선 민중은 중국인이 아닌 외국인을 모두 왜놈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었지요. 나는 서울에 돌아온 후 부모님 앞 편지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정변의 발발로 여행 중에 큰 위험에 처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거의 모든 외국인들을 왜놈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관리의 집으로 피신하면 위험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가까스로 관리를 접촉하였습니다. 그러나 관리는 도움을 주기는커녕 저를 매몰차게 거절하였고 설상가상으로 그 고장 사람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그때부터 이틀간 참담한 경험을 해야 했답니다. 묵고 있던 주막에 한밤중에 몽둥이를 든 군중이 문짝을 쳐 부수고 들이닥친 일도 있었답니다. 위험을 가까스로 벗어나기는 했지만 그 즈음 겪었던 일을 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이제 죽는가 보다 하고 생각한 적이 세 차례나 있었지요. 하지만 그때마다 정신을 차리고, 저는 하나님이 보우하시리라는 믿음을 다지곤 했답니다. .....

서울로 돌아와 보니 집이 완전히 털렸더군요.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 집안의 모든 물건이 길거리로 내동이쳐진 채 불에 타거나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훔쳐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저는 소유물을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책자와 문서가 죄다 사라진 것이 가장 뼈아픕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수난은, 저의 마음을 끌었고 또 제가 진정으로 돕고자 했던 조선의 재앙으로 인해 제가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에 비하면 별 게 아닐 겁니다."
- 1884년 12월 17일자 편지에서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 #갑신정변 #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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