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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얼을 빼놓는 일'에서 벗어났습니다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해도 되는 세상은 가능할까... '필경사 바틀비' 단상

등록 2023.01.29 11:58수정 2023.01.30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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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기계로서, 자신의 육신을 바쳐 국가를 섬기고 있다."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지난해 마지막 날을 기해 법률사무소에서 하던 일을 그만뒀다. 고용주가 권고하는 사직제안을 받아들여 퇴사한 것이다. 수 년 동안 나를 옥죄던 업무에서 풀려나니 감옥에서 출소한 듯 홀가분했다. 

"하고 싶지 않다"는 말

매일 아침마다 집 근처 구립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은 오아시스 같은 공간이었다. 열람실에 앉아 이런저런 책과 잡지를 뒤적이며 느긋하게 지냈더니 일주일쯤 지나 고질적인 두통이 사라지고 심리적 여유도 생겼다. 그 즈음 도서관 서가에 꽂힌 <필경사 바틀비>를 우연히 보고 호기심에 집어들었다. 읽어보니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지는 이야기라 그 소회를 적어본다.   

바틀비는 뉴욕 월가의 법률사무소에서 필경사로 일한다. 100단어 당 4센트의 임금을 받고 수백 쪽의 법률 문서를 묵묵히, 꼼꼼히 필사한다.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어 유령처럼 창백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었지만 깡마른 그의 모습에서는 쓸쓸한 분위기가 풍긴다. 어느 날인가부터 바틀비가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반복하자 고용주와 동료들, 주변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화자인 고용주는 이토록 기이하고 이해 못 할 인간을 고용한 댓가로 예상치 못한 곤혹을 치르지만 가까이에서 그를 관찰하며 인간적으로 깊은 측은지심을 느낀다.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바틀비가 미국의 한 법률사무소에서 문서를 필사하며 살아갔다면, 나는 수 년 전부터 얼마전까지 대한민국의 작은 법률사무소에서 법률문서를 정리하며 살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률 사건에 따라 9자리 이상의 숫자로 분류된 문서를 기일에 맞춰 팔로우업 하며 그 처리과정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저장하는 일을 했다.


과거 펜으로 하던 일을 지금은 컴퓨터로 작업한다는 점이 다르지만 일의 성격을 놓고 보면 바틀비가 하던 일이나 내가 하던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대단히 어렵거나 복잡한 일은 아니다. 다만 물리적으로 소요되는 작업시간과 집중강도 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할 때가 많아 이런 일은 '인간의 얼을 빼놓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다시, 나의 경우

일하는 동안 나는 사건번호를 정확히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수시로 일련번호를 확인하다 신경쇠약에 걸리는 줄 알았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온몸이 돌처럼 굳어버리는 상상을 수없이 하고 밤이면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다보니 몸이 배겨내질 못했다.

결국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돼 고용주에게 퇴사 의사를 밝혔다. 고용주는 '일에 적응되지 않아 그럴 테니 조금 더 해보면,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고 답했다. 그 말을 믿고 계속 일했는데, 퇴사하는 날까지 내 증상은 별로 나아진 게 없었다.

바틀비가 '하지 않겠다'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고용주와 주변인들을 당황하게 했을 때, 나는 바틀비의 그런 행동이 고용주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라기보다는 고립된 환경에서 비인간적인 업무를 하다 정신이 나가버린 영혼의 처절한 외침이라고 즉각 결론지었다. 

바틀비 말고 다른 두 명의 필경사가 오전과 오후에 번갈아 가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이 거칠어지거나 과민성 소화불량 증세를 보이는 걸 봐도 이것이 비인간적인 업무환경에 노출된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는 스트레스성 현상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감옥처럼 고립된 공간에서 몇 백 페이지나 되는 서류를 필사한다고 생각해보라. 당장 입맛이 뚝 떨어질 것이다. 필사는 인간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보다 죗값으로 치르는 '벌'의 성격이 크다. 게다가 잠시 쉬려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시커멓고 육중한 벽 뿐이라면, 어느 영혼이 병들지 않고 온전히 배겨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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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의 그림. ⓒ National Library Israel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 소외는 네 가지 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우선 생산활동과 인간 고유의 '유적 본성'에서 소외된다. 인간은 본래 노동을 통해 자신을 실현하는 '유적 존재'인데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받고 생존을 위해 노동하게 되는 순간, 노동은 자기 삶을 실현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지루하고 무의미한 과정이 된다는 얘기다. 

거기에 노동의 결과물인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이기 때문에 생산물로부터도 소외되고, 다른 노동자들과 임금이나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되면 동료 노동자들로부터도 소외되게 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어떻게 '왕따'로 만드나?' [김호기 교수의 사회학 고전읽기 시즌3 ①] 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 오마이뉴스)


법률사무소에서 필경사로 일하기 전 바틀비는 워싱턴의 우편물 반송센터에서 일했다고 전한다. 주인없는 우편물을 분류해 소각하는 작업환경이 바틀비를 우울한 인간으로 만들었을 거라 화자는 추측한다.

그것이 단순반복작업이기도 하거니와 절망감을 유발하는 환경이라 그렇다는 것이다. 무상감을 느끼게하는 환경 속에서 희망을 품는 인간이 되기란 힘들다. 천성적으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러하다. 바틀비의 정신이상 증세는 그의 노동 이력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살기 위해 한 일이 죽음을 재촉한 결과를 가져왔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노동이 자기 삶을 실현하는 것과 무관하게 지루하고 무의미한 과정이 될 때 인간 영혼은 병들고 종국에는 노동에서 소외된다는 칼 마르크스의 일침은 바틀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처럼 들린다. 바틀비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시스템, 즉 자본주의는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얼마나 무심하고 무자비한가.  

바틀비의 고용주는 고생없이 살아온 자본가다. 하지만 바틀비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지상정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나는 그가 적어도 악덕 고용주는 아니라 생각한다. 자기 이익에만 충실한 자본가의 전형이긴 해도 그는 바틀비가 죽는 순간을 지켜보며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다는 걸 안타까워했다.

내면의 싹

도서관에서 온라인으로 실업급여 신청과정을 밟았다. 구직활동을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며 특기는 무엇인지, 구직에 도움이 될 만한 경력에는 뭐가 있는지 되새겨봤다. 짧은 글 몇 문장으로 압축된 나의 이력을 노동시장에 내놔야 하는 현실을 떠올리자 살짝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필경사 바틀비'의 마지막 대목을 떠올리며 막연하나마 희망을 갖기로 했다. 새들이 구치소 안마당에 풀씨를 하나둘 떨어뜨리고 날아가자 어느 날 갑자기 두터운 벽돌 틈으로 부드러운 싹이 트는 풍경을 묘사한 이 대목에서 언젠가는 두터운 벽을 뚫고 솟아날 지도 모를 내 내면의 싹을 떠올렸다.

지난 27일 고용센터에 실업인정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나마 이런 복지제도가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앞서간 수많은 바틀비들 그리고 산재사고를 겪은 무수한 노동자들의 희생 덕분이라 생각했다. 다음 달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구직활동을 해보리라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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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연필 스케치 ⓒ 홍윤정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문학동네, 2011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노동자 #자본주의 #노동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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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애호가, 아마추어화가입니다. 미술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씁니다. 책을 읽고 단상글을 쓰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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