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가사가 등장하는 <사나이 비련> 음반 딱지
이준희
그런데 위 세 건보다 발표 시기가 앞서는 일본어 가사 자료가 최근 하나 더 새롭게 발굴이 됐다.
<남인수 걸작집>은 1940년 8월 19일에 첫 광고가 등장하는데, 약간 앞서는 8월 9일에 광고가 나온 <사나이 비련> 역시 3절 가사가 일본어임이 확인된 것이다. 광고로 확인할 수 있는 발매뿐만 아니라, <사나이 비련>은 6월 7일에 녹음된 <남인수 걸작집>(녹음번호 K1525~1526)보다 녹음도 더 먼저 이루어졌다(녹음번호 K1514).
何故よ 夜明けの鐘が鳴るまで(왜일까, 날이 새는 종이 울리기까지)
柱にもたれて 泣き明かせ(기둥에 기대어 울며 새네)
風を織る手に離す手に(바람을 짜는 손에 풀어내는 손에)
熱い涙の溜がする(뜨거운 눈물의 한숨만 나오네)
<사나이 비련> 3절 가사. 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부 강태웅 교수 채록·번역
<사나이 비련> 또한 작사자는 조명암이지만, 녹음한 이는 남인수가 아니라 신인가수 봉일이었다. 그리고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에게 일본어 가사 표현이라는 부담스러운 과제가 주어진 데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1940년 5월에 열린 오케레코드 콩쿠르에서 당선되어 대중가요 가수가 된 봉일은 앞서 일본 음악학교에 유학을 가서 성악을 전공하고 돌아온 바리톤 가수였고, 당연히 일본어 가창에 매우 능숙했기 때문이다.
본명이 김상련인 봉일은 오케레코드 콩쿠르보다 먼저 1940년 3월 도쿄에서 열린 신인소개음악회에 출연했고, 5월에는 서울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일보사 주최 신인음악회에도 참가했다. 불과 며칠 간격으로 같은 장소에서 열린 오케레코드 콩쿠르와 조선일보사 신인음악회에 겹치기(?) 출연을 했던 셈인데, 김상련의 최종 선택은 성악가가 아닌 대중가요 가수 봉일로 데뷔하는 것이었다.
안정적인 가창과 능숙한 일본어 가사 표현으로 데뷔곡 <사나이 비련>을 발표한 봉일은, 그러나 대중가요 가수 활동을 그리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몇 달 뒤 <항구의 골통대>라는 곡을 하나 더 음반으로 발표한 이후 그의 노래는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다. 무대에서도 역시 봉일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41년 이후로는 사실상 가수 활동을 접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수 봉일이나 작사가 조명암이 어떤 이유로 일본어 가사를 부르고 만들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은근한 압력이 있었을 수도 있고, 뭔가 주목받고 싶다는 개인의 공명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일본어 가사가 처음 등장하는 <사나이 비련>이 만들어진 시기가 문제의 황기 2600년, 신체제 열기가 한창 뜨거웠던 때라는 점이다. 역사적 현상이 개인의 행위와 아울러 사회적 조건의 산물일 수밖에 없음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최초 사례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사나이 비련>에 앞서는 일본어 가사가 발견될 가능성은 그래서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그것이 1940년 이전일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세태가 조성한 배경이 그리 허술하지는 않은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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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제 열기 속에 등장한 조선 유행가 속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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