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랜 없었던 한강변의 풍경 큰 비가 내린 후 흘러 온 흙더미가 점점 넓어지더니 새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김지은
그 풍경을 보며 달리는데 나도 모르게 생각이 확장됐다. 내가 매일 쓰는 문장도 이런 게 아닐까. 몇 문장 쓰지 않지만 별 것 아닌 그 문장이 또 다른 문장을 부르고 불러 결국엔 하나의 글을 만들지 않을까. 그렇게 완성된 글이 누군가에게 쉼이 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을 상상한다. 나는 한 없이 부족한 사람이고 잘 넘어지지만 그 사유를 붙잡고 또 살아갈 힘을 얻는다.
'공모전 당선'이라는 목표를 품에 안고
얼마 전에는 미세먼지로 한참을 못 뛰다 오랜만에 뛰어 그런지 움직임이 아주 둔하게 느껴졌다. 불필요한 움직임을 통제하려고 노력하니 조금씩 힘이 났다. 그렇게 호흡이 익숙해졌을 즈음 갑자기 1월 1일에 했던 목표 체크 및 새해 계획 세우기 이벤트가 생각났다. 비밀 노트에 매년 자신의 목표를 쓰고 그다음 해 1월 1일에 얼마나 목표를 달성했는지 확인하는 가족 이벤트다.
비밀 노트는 일년내내 테이프로 칭칭 감겨있다가 1월 1일에만 조심스럽게 개봉된다. 이번에는 비밀 노트를 연 김에 지난 3년간 정했던 목표를 훑어보았다. 딸은 피아노라면 질색을 하는데 3년 전에는 '소곡집의 18번, 19번을 안 보기 치기' 같은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목표가 적혀 있었다. 우린 그 목표를 보며 깔깔 웃었다.
남편은 돈에 관한 목표가 많았다. 얼마를 벌고 어떤 계좌를 만들고 하는 목표들. 나는 안타깝게도 3년 내내 1번 목표가 같았다. 공모전 당선. 남편과 아이는 내 목표를 보고 하하하 웃었다. 다른 목표들도 매년 거의 비슷하다. 운동 관련 목표, 독서에 대한 목표들. 에이, 내 목표는 재미가 없네. 난 시무룩해졌다.
달리며 그 일이 퍼뜩 떠올랐는데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3년 내내, 아니 올해까지 4년째 공모전 당선이라는 목표를 가질 수 있다니. 공모전에 응모할 수 있는 환경이 3년 내내 조성됐다니.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이 있고 큰 에너지가 들지 않는 벌이(물론 큰돈을 벌진 못한다)가 있고 아이는 거의 손이 가지 않을 정도로 컸다. 아, 이런 내가 감사한 시간을 누리고 있구나.
몇 년 전에 읽은 김금희의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란 소설의 한 부분이 생각났다.
"너는 가끔 잊는 것 같아. 너가 되게 운이 좋은 아이라는 것."
"내가 뭐가 운이 좋니? 운이 좋으면 이렇게 몇 년을 임용고시를 못 붙겠어?"
"그러니까 그 못 붙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다는 거야." (33쪽)
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날 둘러싼 환경들이 나에게 '조금만 더해!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 주고 있잖아!'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역시 문제는 나 자신이다. 감사가 우울을 덮었다. 올해는 조금 더 해봐야겠다는 의지와 희망이 솟는다.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사유들이 달릴 때 떠오르니,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