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정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오월의봄
태아산재는 산재·여성 노동·여성 노동자의 건강과 재생산권·돌봄·질환과 장애 정체성·정상가족 이데올로기 등이 복합적으로 얽힌 문제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보려 하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아 문제가 되지 못한 문제다. 폭발·무너짐·화재·추락·끼임처럼 눈에 보이고 이목을 끄는 산재 사고와 달리, 잠복기가 길고 인과관계를 명확히 알기 어렵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산재 질병에 대한 관심은 낮다.
게다가 많은 사람게 질병 산재는 내가 일할 가능성이 없는 공간에서 생기는 나와 무관한 일이다. 산재를 입은 노동자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은 상대적으로 "젊고, 신체가 '건강'한 비장애인, 일정 학력 이상을 갖추고 도시의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에게 더 향한다.
태아산재가 덜 주목받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당사자들이 여성이라는 데 있다. 간호사들에 이어 두 번째로 태아산재를 신청한 이들은 반도체 여성 노동자들이다. 고졸(전문대졸), 여성,
생산직, 오퍼레이터라 불리는 반도체 노동자들의 대표 특징이다. 여기에 지역 불균형, 가족이라는 경제적 자원의 격차라는 불평등이 더해져 이들을 반도체 노동자로 살게 했다.
그들은 촉박한 생산 일정과 유해물질로 가득한 혹독한 작업환경 탓에 생리통, 불규칙한 생리 주기와 생리혈의 양, 난임, 불임, 유산을 겪었다. 그럼에도 그것이 회사와 업무 때문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생식기능, 생식능력 또는 태아의 발생, 발육에 유해한 영향을 주는 물질인 생식독성물질에 노출된 가임기 여성이 국내 최소 10만 명이 있다고 한다.
유럽연합은 381종, 캐나다는 164종을 생식독성물질로 분류해 관리하지만, 우리 고용노동부가 지정한 생식독성물질은 44종에 불과하다. 물질마다 관리방식, 노출 기준, 제한 기준이 제각각이고 혼합물질과 부산물까지 있어 개인이 생식독성물질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기 어렵고, 해당 물질의 취급 방법 등 설명자료를 직장 내 비치해야 하지만 대다수 사업장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
"여기서 오래 일하면 딸만 낳는다", "고자된다". 반도체 사업장에서 생식독성물질을 직접 취급하는 남성 엔지니어들끼리 하는 흔한 농담이었다. 그들은 그것이 위험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잘 알지 못했다.
몰라도 누출이 안 되게만 관리하면 되었다. 반면 오퍼레이터들은 정말로 몰랐다. 사원을 '가족'이라고 말하는 대기업이니까 믿었다. 기업은 '무지할 수밖에 없는 조건'의 사람을 뽑았다. 나이가 어리고 '사회경험'이 없고 지역사회와 분리된 여성들.(119쪽)
이들의 생리통, 생리불순, 유산, 난임은 공공연하게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럽고 사소한 문제로 치부돼 일터 탓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직장에서 여성의 몸은 비정상적이고 열등한 '제2의 몸'으로, 여성의 노동은 '부차적 노동'으로 여겨져, 교대근무·열악한 근무일정·화학물질 노출로 인한 월경 주기 이상·월경통·불임과 같이 여성에 특정된 업무 관련 상태에 대해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한다는 케런 메싱의 지적 그대로다.(케런 메싱, <일그러진 몸> 참조)
여성의 노동 자체가 쉬운 노동, 덜 중요한 노동, 주변적인 노동으로 취급되는 데다가 오랫동안 남성노동자 중심으로 조직돼 온 노동현장에서 육체노동 중 당하는 사고를 중심으로 마련된 산업안전보건체계 및 산재보상체계는 여성노동자 특유의 임신, 출산, 육아, 가사노동 등에서 비롯되는 여성의 건강문제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박귀천, '모의 업무에 기인한 태아의 건강손상에 대한 책임 - 생명, 젠더, 노동에 대한 질문', 이화여자대학교 법학논집 제22권 제2호, 164쪽)
'엄마가 돼서 그것도 몰랐냐'는 말
질책과 비난은 회사나 정부가 아닌 아픈 아이를 낳은 여성들을 향한다. 임신해놓고도 바보처럼 거기를 다녔냐고, 엄마가 돼서 그것도 몰랐냐는 식이다. 유산이나 '기형아' 출산은 엄마의 책임으로 간주되는 탓에 자녀 질환 문제를 제보하면서 '시댁은 몰랐으면 한다'고 당부하는 이들이 있다. 시댁이, 가족이 모르려면 세상이 몰라야 한다.
후회와 자책감 속에 언제나 애쓰고 긴장하고 살피며, 순간순간 치명적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집에서는 돌봄이 늘고, 직장에서는 안 아픈 사람인 척하느라 그가 더 신경 쓰고 챙겨야 할 일이 많아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취급된다. 아픈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의 돌봄에서 일방적인 희생이나 의무, 의존만을 읽어내지는 않는다. 양육자와 자녀의 관계에서 "관계는 서로에게 내 마음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고, 알려고 하는 것이고, 알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고, 서로가 다르면서도 연결된 존재임을 아는 과정이라 배웠다"고 쓴다.(41쪽)
태아산재법이 생겼지만, 법은 어머니의 유해요인 노출로 인한 자녀의 건강손상만 반영했을 뿐 아버지 일터의 위험으로 인한 태아산재는 원천적으로 배제했다. 아버지 쪽 영향으로 인한 태아산재는 분명히 존재함에도 남성 노동자의 자녀 질환이 산재로 인정될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 것이다.
태아산재의 인정은 재생산이 여성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책임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태아산재 소송과 법 개정 과정에서 임신한 여성 노동자에 대한 특별한 보호의 필요성과 임신 중 모체와 태아는 한 몸이라는 사실이 강조돼 재생산건강의 문제가 모든 노동자의 보편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김선혜 '산업재해로서 태아건강손상 :여성노동자 모성보호강화를 넘어 보편적 재생산건강 문제로', 한국여성학 제38권 4호 참조)
그리고 질병으로 회사를 휴직하게 될 경우 생계비를 보전하기 위한 용도인 휴업급여는 지급하지 않는다. 질병이 있는 태아가 나중에 노동자가 될 일이 없다고 믿지 않는 다음에야 그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이 일터에 존재한다는 배제의 정치'가 하나의 믿음이 된 것이다.
그 믿음은 일터의 환경을 아픈 사람들이 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근무시간, 업무량, 속도, 업무 방식과 강도, 심지어 책상과 의자 높이, 실내 온도, 정수기 물통마저. '다른 몸'은 들어갈 자리가 없다."(228쪽)
저출산 고령화 대책에도 자녀가 아프게 태어날 가능성에 대한 대처, 아프거나 장애를 겪을 몸에 대한 대응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지원금을 제공하고 육아휴직을 늘리면 모두가 (건강한) 자녀를 낳이 키울 수 있다는 듯이, 한 해 8만 명에 다다르는 산모가 자연유산을 하는 현실은 없다는 듯이."(241쪽)
게다가 태아의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확인된 1484가지 화학물질 중 산재보험법 시행령이 인정한 물질은 단 17개에 불과하다. 법원이 제주의료원 사건에서 산재 인정 근거로 든 과로, 스트레스, 교대근무도 반영되지 않았다. 고용노동부는 시행령을 통해 사실상 태아산재법을 무력화했다.
태아산재는 국내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선진국이 된 한국은 이제 각종 직업병과 유산, 난임, 2세 질환을 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로 수출하고 있다.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맞서 전자산업의 환경파괴와 직업병 피해에 관한 국제연대가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한국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그 대가가 노동자와 그 자녀의 죽음과 질병이라는 사실 앞에 먼저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그리고 분노를 느껴야 하지 않을까?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덕에 문제를 알았으니.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 우리 아이는 왜 아프게 태어났을까, 그 물음의 답을 찾다
희정 (지은이), 반올림 (기획),
오월의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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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불순·유산·난임·태아산재... 과연 여성노동자의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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