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픽사베이
많은 유튜브 콘텐츠와 서점의 매대를 보면 행복 마케팅이 성행한다. '행복해지는 비법',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 등 행복을 제목으로 달면 많은 이들을 낚을 수 있다. 그만큼 행복은 잘 팔리는 소재다. 그도 그럴 것이, 지인들에게 인생의 목표 또는 가치, 사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행복"하기 위해 산다고 답한다.
천근만근한 몸을 이끌고 새벽부터 가게 문을 여는 것도,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컴퓨터 앞에 앉아 여러 시간 일을 하는 것도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다. 이렇듯 우리가 매일매일의 기껍지 않은 것들을 감내하며 최종적으로 기다리는 것은 행복(한 삶)이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에 대해선 각자 나름의 대안이 있다. 성공을 하면, 돈을 많이 벌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시간을 보내면 등 각자의 방법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그런 모든 노력들이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목표에 수렴하니, 행복이란 것은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감이 엄청나다.
인간도 자연법칙에 따른 생명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결국 인간은 진화의 산물이며 모든 생각과 행위의 이유는 생존을 위함이다.(...) 간단히 말해,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행복감을 느끼도록 설계된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가 행복이라는 것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인간은 위험한 상황 또는 사회생활을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행복을 주는 쾌의 감정에 반응하도록 진화된 것일 뿐이지만 현대인은 행복에 철학적인 관념을 튀김옷마냥 입혀서 소비한다. 즉, 생존을 위해 행복한 것이지 행복하려고 생존하는 것은 아니기에 인생의 목표를 행복으로 삼는 건 주객전도의 삶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자연의 모든 것은 분명한 존재 이유와 목적을 품고 있다는 목적론적 사고의 원조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의 인생관도 목적론적인데 그는 행복을 최고 선(summum bonum)이라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한 철학자가 가졌던 개인적인 견해일 뿐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다.
늘 삶의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잘 살다가도 방향성을 잃은 것 같거나 허무를 느낄 때면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이렇게 애쓰며 사는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애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인생관이 전제된 세상에서 살기 때문에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삶에는 목적이 있고, 도달해야 할 최고의 선이자 지향점이 행복'이라는 믿음이 사실 한 철학자의 견해일 뿐이라는 인식은 개인적으로 맞이한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일종의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일 수 있겠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권위 있는 철학자라고 그의 말이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할머니, 사람은 왜 사는 걸까? 사는 이유가 뭘까?" 짧은 세월마저도 고단할진대, 인생의 신산을 다 경험한 노인이 살아보니 알게 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아흔 넘은 할머니는 말씀하셨다.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거지. 이유가 어딨어." 인간도 동물 종의 하나인데 우리는 어쩌면 인간으로 사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찾으려 해서, 그래서 불필요한 고단함을 짊어지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동물들처럼 생존과 재생산이 사는 이유고 목적이라면 '왜 사는 걸까?'라는 고민은 불필요하다. 더구나 저출생 사회가 방증하듯 인간에게 재생산이 가지는 목표로서의 가치는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생존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는 진화론에 기반한 과학적 답변은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는 위로로 들리기까지 한다. 꼭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을 달성하지 않아도, 그리고 행복하지 않아도 그냥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니까.
행복은 맛있는 아이스크림이자 소중한 월급
행복이 삶의 목적은 아니어도 삶을 이어가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는 것에는 다수가 동의할 것이다. 돈만이 직장 생활의 목적은 아니지만,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이 '금융치료'가 되어 또 한 달을 버티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행복도 월급처럼 들어오는 날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될수록 그 존재 가치가 점점 희미해진다. 다음 월급이 들어올 때를 기다리듯 다음 행복을 기다리며 일상을 또 살아낸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 행복은 아이스크림 같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행복은 아이스크림, 모든 것은 녹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자주 맛보자.
행복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효율적인 판단 기제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말하듯, 인간이 쾌와 불쾌라는 감정 신호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생존에 관련된 상황판단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다. 행복이 무엇인지 단순 정의할 순 없지만 행복감이라고 느끼는 것은 안전과 편안함, 즐거움과 연결되며 이는 생존에 유리한 환경을 추구하고 그에 맞게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행복하게 살 거라는 사람의 말은 일리가 있다. 돈은 생존에 유리한 안전과 편안함을 보장해 주고 이는 행복감을 주며 결국 생존이라는 삶의 목적을 달성케 한다.
호모사피엔스에게 다른 사람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생존 과정에서 타인의 보호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 많아서다. 하지만 돈이 만들어지면서 인간의 나약함을 보완해 주는 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 돈의 존재감이 커지는 만큼 사람의 존재감은 작아진다.
행복이 수단으로서 생존에 기여한다면 행복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을 갖고 있는 것, 그리고 행복을 더 자주 느낄 수 있는 것은 생존에 유리하다. 후자에 대해 먼저 말해보면, 행복의 역치가 낮아 더 자주 행복한 사람이 있다. 좀 더 긍정적이고 외향적인 성향은 유전적 요인으로 그런 사람은 운 좋게도 더 쉽게 행복할 수 있게 태어난 것이다. 물론 유전만이 다는 아니다. 집단주의 문화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행복 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는 연구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전자, 행복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은 수두룩하게 생각해 낼 수 있다. 돈을 쓰는 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일,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일 등 개인의 선호와 취향이 반영된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무엇보다 돈의 힘이 막강한 자본주의에서 돈은 보편적인 행복 추구 수단이다. 많은 행복 연구가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밝혔고 일정 수준까지는 돈이 행복에 기여한다는 결과는 이제 익숙하다.
외향적인 사람이 타인을 찾는 이유가 자극 추구라는 연구도 있다. 사실 사람만큼 자극적인 자극도 없다. 사람은 즐거움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때론 가장 큰 스트레스가 된다.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사람들과 즐겁게 모여서 지내고 싶어 한다.
돈으로 거래되는 재화와 서비스가 지금처럼 다양해지기 전, 작고 유약한 개인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집단에 속해 서로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우리는 점점 사람이 아닌 돈에 의지한다. 구매 대상이 시간과 노동으로 점점 그 범위가 넓어지고, 코로나 시기에 비대면 기술 확산으로 돈만 있으면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잘 살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겉으로는 잘 돌아가는 듯 보였지만 코로나 시기에 우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오랜 세월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호모사피엔스의 진화과정상 사람은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한다. 조금은 귀찮고 불편한 자극이기도 하지만 가장 강력한 자극인 사람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행복이 있음을 알기에 끊임없이 서로를 찾는 것이다.
행복해지는 세 가지 확실한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