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에서 태어난 세로가 사바나 초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생츄어리를 고려해 보는 건 어떨까.
최원형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대륙을 가로질러 적도가 지나는 위아래 지역은 초록이 가득하다. 열대우림도 있고 사바나 초원도 있는 바로 그 일대, 그러니까 짐바브웨에서 수단에 이르는 지역 어딘가에 세로의 친척인 그랜트얼룩말들이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며 살아간다. 얼룩말은 본래 이렇게 무리를 이루며 살아가는 습성을 지녔다.
그러나 세로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부모를 잃고 홀로 살아가고 있다. 동물원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동물원 공간을 확장하려면 예산확보 등 현실적 문제가 뒤따른다. 아니 애당초 동물을 가둔다는 생각에서부터 문제는 배태돼 있었다.
탈출 사건 이후 세로를 보기 위해 동물원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보고 싶은 건 무엇일까? 탈출했던 얼룩말에 대한 호기심도 있겠지만 연민의 마음을 담아 세로의 안부가 궁금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세로는 그곳에서 안녕할 수 있을까? 안녕의 의미는 또 뭘까? 이상하지 않은가? 야생동물이 도심에 나오는 건 무조건 위협적인데 또 한편에서는 일부러 야생동물을 가둬놓고 전시를 하는 이 아이러니가 말이다.
안전하게 가둬놓은 동물도 일단 탈출하면 야생에서 출몰한 동물과 똑같이 '위협적인 대상'으로 지위가 바뀐다. 동물이 탈출할 때마다 동물원 존립에 대한 논란도 반복된다. 종 보전과 연구 그리고 교육을 위해 동물원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한결같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할 때 과연 동물의 감정은 고려하는 걸까?
디디에 데냉크스(Didier Daeninckx)의 소설 <파리의 식인종>에는 1931년 파리에서 열린 식민지 박람회에서 우리에 갇혀 짐승처럼 전시되었던 남태평양 누벨칼레도니 원주민 '카낙'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백여 명의 카낙들은 전통문화를 전시하러 참가했다가 동물원에 갇힌다. 이들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방문객을 끌어야 했고, 일부는 악어와 맞교환되어 독일 서커스단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주인공의 분노를 통해 우리에 갇혀 지내며 느꼈던 수치심이 독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비단 인간만이 그런 수치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윈은 1872년에 출간된 책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에서 동물도 인간처럼 기쁨·슬픔·분노 같은 감정을 느끼며 표정도 인간과 비슷하다고 했다. 콜로라도 대학교 진화생물학 명예교수인 마크 베코프(Marc Bekoff) 역시 동물이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은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요지는 동물도 인간처럼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2005년 미국 디트로이트 동물원의 코끼리 전시관이 문을 닫은 사실이 흥미롭다. "도시에 있는 동물원에서 코끼리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동물원이 애당초 인간의 욕망 충족을 위해 시작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동물원에 갇힌 동물은 행복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디트로이트 동물원에 있던 코끼리들은 야생동물보호구역으로 옮겨져 행복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영국 런던 동물원,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 아르헨티나 멘도자 동물원 등 다른 나라의 여러 동물원 역시 코끼리를 보호구역으로 보냈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세로가 사바나 초원으로 돌아가는 일은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단계적으로 생츄어리(착취당한 동물이나 부상입은 동물, 어미를 잃은 새끼동물 등을 평생 보호하는 시설)를 고려해 보는 건 어떨까?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동물의 삶을 소비하는 것이 과연 괜찮은지 이제는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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