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범어사 등나무 군락
문화재청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든 근현대사의 흔적이 없는 곳이 있겠느냐만, 부산은 6.25 전쟁의 피란수도가 돼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진 도시다. 서쪽으로는 피난민들을 수용하던 산비탈의 오랜 주거지들이 알록달록 옷을 바꿔 입고 특유의 정취를 풍기며, 동쪽 해변 라인의 광안대교와 해운대의 높은 빌딩이 화려한 야경을 뽐내며 역동적인 이 도시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반면 북쪽에 위치한 부산의 가장 높은 산인 금정산(810m)은 다른 쪽이 시대에 따라 모습을 바꾸어 온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하게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 중턱에는 신라 문무왕 시대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남 3대 사찰 범어사가 자리잡고 있다.
부산 사람, 특히 동래 권역에서 살아온 시민에게 범어사는 친숙한 나들이 코스일 것이다. 곳곳에 숨은 암자도 이곳의 매력.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접근성도 한몫해서, 사생대회 등 현장학습 장소부터 금정산 등산의 마지막 코스 등으로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는 부산의 대표 사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등나무 군락지가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에게만 알려져 있는 듯 하다. 지역주민이라 가끔 범어사에 들르는 것을 좋아하는데도 가람 내에 큰 규모의 등나무 군락지가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됐다.
시간이 멈춘 듯한 세상... 숲이 주는 사색의 시간
산에서 내려오는 등산객들과 범어사로 가기 위해 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교차하는 범어사 입구에서 눈을 돌리면 안내판과 함께 샛길이 하나 보인다. 바로 등나무 군락지로 이어지는 길이다.
한 군데 무리 지어 자라는 것이 드물다는 등나무가 6만 5502㎡의 면적에 약 6500그루 정도 서식하고 있어서 학술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다.
몇 걸음 들어섰을 뿐인데 이곳의 공기가 갑자기 미묘하게 바뀐 것만 같다. 봄을 맞아 다양한 농도의 초록을 한껏 자랑하는 무성한 숲길과 그 밑을 조용히 흐르는 계곡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속세를 벗어난 공간인 사찰과 또 다르게 아예 멈춘 것만 같은 아득한 세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