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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이 안돼 죽는다"... 자결 시도한 독립운동가, 그 내막

[무강 문일민 평전] (22) 중앙청 할복 의거 2

등록 2023.05.17 14:30수정 2023.05.1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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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계기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와 선양이 활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의 그림자로 남은 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인물들이 많습니다.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 1894~1968)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평남도청 투탄 의거·이승만 탄핵 주도·프랑스 영사 암살 시도·중앙청 할복 의거 등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문일민의 삶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독립운동가들이 여전히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문일민이라는 또 한 명의 독립운동가를 기억하기 위해 <무강 문일민 평전>을 연재합니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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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당시 중앙청. 1926년 조선총독부 청사로 지어졌다가 해방 후 미군정 청사, 대통령 집무실,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활용되었다. 1996년 김영삼 정부 때 철거됐다. ⓒ 한국저작권위원회


1947년 10월 25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미군정 청사인 중앙청에 도착한 문일민은 품 속에 있던 면도칼을 꺼내 자신의 배를 갈랐다. 오전 11시 45분경이었다. 이른바 '중앙청 할복 의거'다(관련 기사: 미군정청 앞에서 '할복 의거'... 그의 이름은 문일민이었다 https://omn.kr/216yk ). 

그날은 토요일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미군정 직원들은 눈 앞에서 펼쳐진 할복 사태에 놀라 우왕좌왕했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헐레벌떡 달려온 수위의 눈앞에 문일민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미군정 청사에서 할복 시도... 혼미한 와중에도 '독립을' 외친 까닭

문일민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서도 '독립을', '독립을' 하면서 독립이라는 단어를 무의식적으로 연발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기사 한 토막을 인용해본다.

"8.15 이후 3년이 되도록 조국의 독립은 안되고 외국인에게 아첨하는 폐풍은 날로 격심해가는 현상에 의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군정청에 가서 군정직원들에게 보아라 하듯이 배를 가르고 자결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즉 지난 25일 오전 11시 45분 중앙청 2층 식당 앞 우편측 통로상에서 국민의회 대의원 문일민씨는 면도칼에 손수건을 감아들고 하복부를 5촌(16.5cm-인용자 주) 가량이나 가르고 자결하였는데 절명은 되지 않았으며 피투성이가 된 가슴 위에는 '문일민 유서(文一民 遺書)'라고 쓴 글발을 남기고 '나는 조선독립이 안 되어서 죽는다'고 가쁜 숨결로 부르짖고 있었다.


때마침 토요일로 퇴청 중에 있던 군정청 직원들은 이 처참한 광경에 놀라 한때 혼란을 일으켰으나 경무부 수사국에서 출두하여 12시 10분 적십자병원으로 입원시켜 응급치료 중에 있으나 다수의 출혈로 그 생명은 위독한 상태에 있다." - <독립신보> 1947.10.26.


전대미문의 중앙청 할복 사건에 언론 역시 해당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문일민이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절명했다고 오보를 내기도 했는데, 당시의 급박하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을 보여준다.

문일민의 품 속에서는 여러 통의 유서가 발견됐는데, 그중에는 직접 쓴 한시(漢詩)도 한 수 있었다. (다른 유서 내용은 본 연재 21부 참조)

救國救民之熱血 구국구민의 뜨거운 피
千秋萬代之情神 천추만대의 정신이라
義意至誠之死者 의로운 뜻과 지극한 정성으로 죽는 자
絶命肉體之不死 육체는 죽되 죽지 않으니
愛國愛民之烈士 애국애민의 열사로다
後世子孫之敎育 후세 자손들에게 교육하노니
派黨爭鬪之根本 파당쟁투의 근본은
亡國滅族之害毒 망국멸족의 해독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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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 25일, 중앙청 청사에서 할복 후 쓰러져 있는 문일민 ⓒ 동아일보

 
수술 끝에 극적으로 목숨 건지고서도... "독립에 활약할 청년 피 받을 수 없다"

문일민은 즉시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았다. 병원으로 이송된 문일민의 상태는 심각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에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다. 의식도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오전 진료 후 퇴근을 준비하던 적십자병원 외과의사 김응준은 갑작스러운 응급환자 소식에 다시 가운을 갈아입고 응급실로 향했다. 그의 눈앞에 피투성이가 된 문일민이 누워있었다. 대체 이렇게까지 자기 몸을 다치게 한 이유가 뭘까 궁금했다.

"환자에게 여러 가지로 물어보았으나 나의 묻는 말에는 응답하지 않고 다만 '한국 독립'이라는 말만 10여 차례 반복하고 비명의 음성으로 '30년 동안 해외에서 파란곡절을 당하면서 혁명운동한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구나!' 하고는 이를 한 번 갈고 긴 한숨을 쉰 뒤 다시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이 분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 김응준 인터뷰 中 (<현대일보> 1947.11.8)

응급수술 끝에 문일민은 극적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소식을 접한 시민들도 "애국자를 살리겠다"며 적십자병원을 자발적으로 찾아와 수혈에 동참했다.

의식을 회복한 문일민은 자신의 팔에 링거가 꽂혀있는 것을 보고 부인에게 '이게 뭐냐'고 물었다.

"수혈주사예요. 한 젊은 청년이 당신을 살리겠다고 피를 주고 갔어요."

그 이야기를 들은 문일민은 밤새 뒤척이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한국 독립에 활약할 청년들의 피를 받는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다음날 문일민은 주치의 김응준을 불러 부탁했다.

"내 피를 다시 빼서 그 청년에게 도로 돌려줄 수는 없습니까?"
"혈액형이 다르므로 그의 피를 받을 수는 있지만 다시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문일민은 괴로워하며 말했다.

"다시는 내게 수혈을 하지 마시오. 앞으로 조국 독립을 위해 활약해야 할 청년들의 피를 받을 수는 없소. 그리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나를 치료할 시간에 차라리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해주시오."

'이 사람은 정말 한국 독립에 대한 생각밖에 없구나' 김응준은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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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의 할복을 보도한 1947년 10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 "독립은 아직 멀고 민생은 날로 도탄에 빠지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 조선일보

 
한편 문일민의 소지품 중에 가성조달(苛性曺達: 수산화나트륨, 일명 양잿물)이 있었다. 문일민의 의식이 회복되자 김응준은 내내 궁금했던 가성조달에 대해 물었다.

"이번 일에 제가 한 가지 기이하게 생각한 것은 그의 소지품 중에 가성조달(苛性曺達)을 발견하였습니다. 요즈음에는 환자의 원기도 다소 회복이 되었으므로 어제야 비로소 가성조달에 대해 물어보니까 '자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안 되겠기에 먼저 가성조달 세 개를 종이에 싸서 복용한 후 약 10분 뒤 할복을 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가성조달을 복용한 후 할복을 그와 같이 심하게 하지 않았던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을 것인데 위(胃)까지 할복을 했기 때문에 위 내용물과 같이 가성조달이 나오고 만 모양입니다.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우리나라가 완전독립할 때까지 활동하라고 하는데 이번 일은 천리(天理)에 어그러지는 일이라' 하고 서로 웃고 말았습니다." - 김응준 인터뷰 中 (<현대일보> 1947.11.8)


요컨대 문일민은 죽기를 각오하고 거사 직전 양잿물까지 삼켜가며 할복을 시도했으나, 공교롭게도 가른 배 사이로 양잿물이 도로 쏟아져나오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얼마나 굳은 각오로 거사에 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중앙청 할복은 '의거', 왜냐면

문일민의 할복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왜 하필 일본인들처럼 할복이냐'
'미군정에 가서 배를 가른다고 독립이 오나'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온당하지 않다. 우선 할복이 일본 고유의 문화라는 점부터 틀렸다. 할복은 전근대 조선에서도 종종 이뤄지던 일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장 편영표는 청나라와의 화의(和議) 소식에 할복 자결했고, 이조참판 정온은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려 하자 역시 할복으로 항거했다. 이처럼 절의를 지키고 자신의 뜻을 호소하기 위해 할복을 한 사례는 한국 역사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는 사례다.

두 번째로 미군정에 가서 할복으로 독립을 호소한 방법이 무모하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문일민은 미군정에 독립을 시켜달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미군정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인들의 독립 의지를 일깨우기 위한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제국 관리였던 민영환 역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 부당성을 알리고 죽음으로 항거하기 위해 할복이라는 수단을 택했다. 민영환의 할복 자결에 민심은 들끓었고 이는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계기가 됐다. 문일민 역시 민영환처럼 자신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한국인들의 단결을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문일민의 할복은 '의거'로 불러야 마땅하며, 이를 두고 무모하다느니 일본 사무라이를 따라했다느니 하는 비판은 부당하다. 중앙청 할복 의거에 대한 당대의 평가와 반향에 대해서는 다음 회차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 23부에서 계속 -

[주요 참고문헌]
<한성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민중일보>, <경향신문>, <독립신보>, <대구시보>, <대동신문>, <현대일보>
조덕송, <民族 大드라마의 証言>(2), 《주간조선》, 1988.1.17
노성환, <할복: 거짓을 가르고 진심을 드러내다>, 민속원, 2022 
덧붙이는 글 본 연재는 글쓴이의 <무강(武剛) 문일민(文一民)의 생애와 민족운동>(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22)을 평전 형식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문일민 #무강문일민평전 #독립운동가 #중앙청할복의거 #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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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한국근대사 전공) / 취미로 전통활쏘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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