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밭을 경작하고 있는 모습
독립기념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지역과 중국 관내에서 항일 독립운동의 중핵이 되었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폭렬투쟁'을 선언하면서 조직된 조선의열단의 핵심멤버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강세우·권준·김옥·박태열·배중세·서상락·신철휴·윤보한·이성우·이종암·이해명·최동윤·한봉근·한봉인 등이다.
의열단은 최초 발기인 13명에서 1924년에는 단원이 약 7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부산경찰서·밀양경찰서·총독부폭파사건, 황옥(黃玉)경부사건, 종로경찰서·동양척식회사·도쿄 나쥬바시(二重僑) 폭파사건을 비롯하여, 그 외에도 16건의 의열투쟁을 실행하여, 독립운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는 1919년 4월 한족회와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독판 이상룡, 부독판 여준, 정무청장 이탁, 군정청장 양규열, 참모장 김동삼, 교관 지청천·신팔균·김경천 등 간부 대부분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이들 외에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한족회와 서로군정서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사는 권계환·김동식·김중한·김우권·김철·김하성·김학규·박명진·백광운·백기환·신용관·오광선·이덕수·이병철·현기선·강화진·김춘식·박영희·백종열·오상세·이운강·최해 등이다.
또한 신흥중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22년 만주 봉천성 환인현에서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에 참여하여 주요 역할을 하였다. 이천민은 군사위원을 맡아 직접 무장투쟁을 주도하고, 자치행정기구에도 여러 명이 참여하였다.
1924년 만주 통화현에서 조직된 참의부(參議府)에는 백광운이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지휘하였다. 이 외에 1925년 만주 영안현에서 조직된 신민부(新民府), 1929년 만주에서 조직된 국민부 등 만주일대의 무장투쟁 단체에는 어김없이 신흥학교와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참여하고 중심이 되었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같은 해 10월의 청산리전투는 이청천·이범석 등 신흥무관학교 교관 출신들이 '항일대첩'을 주도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1940년 중국 충징에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조직된 항일무장부대 광복군의 창설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지청천·김학규·김원봉·이범석·권준·신동열·오광선 등이다. 광복군총사령 지청천·참모장 이범석, 제1지대장 김원봉·제3지대장 김학규 등 모두 신흥무관학교 간부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사관을 육성한 요람이었다.
주석
15> 서중석, 앞의 책, 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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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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