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부대 입구보산동 맞은편 미군 부대 입구. 수만 명이 주둔하다 평택으로 이전하고 소규모 부대만 남아 있다는 주민들의 전언.
이영천
몰려드는 속도가 흡사 불나방을 방불했다. 공간을 세우는 무슨 계획이나 있었을까? 자연 지형을 따라 얼기설기 우후죽순이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옥과 전답, 토지를 강탈당하다시피 미군에 빼앗기고 쫓겨 온 이들도 부지기수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어찌 되었건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다.
양주 이담면(伊淡面)이, 십여 년 만에 읍(邑)으로 승격하면서 동두천이란 이름을 얻는다. 전쟁 후였음에도 사회적 인구 증가가 얼마나 폭발적이었는지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공간은 미군의 소비력으로 번성한다.
그러다 맞아들인 첫 위기가 1971년 미군 7사단의 철수였다. 한반도 내 2만여 병력을 감축하면서 동두천이 직격탄을 맞는다. 1970년대 내내 이어진 한·미 간 눈에 보이지 않은 긴장 관계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 창설로 매듭지어지기까지다. 파주에 주둔하던 미군 2사단이 동두천으로 둥지를 옮겨온 건 다행(?)이었을까? 규모는 작아졌을지언정, 어쨌든 미군의 존재는 유효했으니 말이다.
1981년 동두천이 시(市)로 승격하지만 뚜렷한 산업시설 없는, 소비 위주의 공간구조는 그 확장성에서도 명확한 한계를 보인다. 미군 동태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를 보이던 공간에 다가온 두 번째 위기는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2천년대 초반, 동두천에 주둔하던 4천여 병력이 이라크 전쟁에 파병되면서부터다.
반전운동이 활발했고, 한국군 파병은 물론 공개 처형당한 한국인이 있던 시기다. 그러함에도 주한 미군 파병이 이뤄졌고, 한국군도 평화유지군으로 파병되던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