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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는 배꼽 주위에... 매일 해도 익숙해지지 않던 일

내 일기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하이퍼 리얼리즘의 난임 이야기 '내일은 또 다른 날'

등록 2023.06.08 04:34수정 2023.06.0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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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신혼이라는 말이 어울리던,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부터 아이는 언제 가질 거냐는 질문을 들었다. 아무래도 남편과 나 모두 삼십 대 중반을 넘기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임신 계획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직은 둘이 좋다', '생각이 없다', '천천히 가질 생각이다'라고 말을 했다. 그때는 마음만 먹으면 쉽게 임신하고 엄마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돌이켜보면 무척이나 순진하고도 건방진 생각이었다. 우리는 애초에 피임이라는 걸 한 적이 없었는데도 임신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주위에 우리와 결혼 시기가 비슷하거나 조금 이른 커플들이 임신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정말 놀랍게도 그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하나 둘 임신 소식을 전했다. 하지만 우리만은 계속 제자리걸음이었다.

가까운 사람들의 임신과 출산 소식, 힘겹다고 말을 하지만 행복의 기운이 가득 담긴 육아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기꺼이 축하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부는 바람은 서서히 거대한 회오리가 되어 커다란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내 일기장을 본 듯 나를 닮은 이야기

우연한 기회에 김금숙 작가의 <내일은 또 다른 날>을 접하게 되었다. 난임 부부를 다뤘다는 주제에 대한 부담, 그래픽 노블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장르에 망설였지만 주제도 장르도 가볍게 생각하기로 하고 첫 페이지를 열었다.
 
배아 두 개를 넣고 누워 있던 30분간 나는 세상의 모든 신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배아가 내 자궁에 착상이 잘되게 해주소서.
부처님, 하나님, 만신님, 세상의 모든 신이여! 제발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도와주소서.
(중략)
너무 많은 신에게 기도를 해서 신들이 노하셨나?
커피도 술도 안 마셨는데, 살살 걸어다녔는데.
생각은 생각을 낳고 낳고 낳고 낳고.
모든 것이 내 잘못 같았다.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가운데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딸기책방
 
망설이고 머뭇거리던 시간이 무색하게 주인공 산과 바다의 이야기는 내 마음 깊이 다가왔다. 혹시 작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일기장을 훔쳐보고 간 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지난 시간의 나와 똑 닮아 있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하이퍼 리얼리즘의 난임 이야기가 바로 그 안에 있었다. 

<내일은 또 다른 날>에서 내 눈을 사로잡았던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화자이자 여성인 바다의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배우자이자 남성인 산의 이야기도 함께 보여줬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내내 무채색이었던 그림이 에필로그에서 비로소 색을 찾았다는 것이다.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딸기책방
 
첫 번째 유산을 하고 남편의 친구 Y를 만난 날이었다. 몇 번의 술잔이 오가고 먼저 말을 꺼낸 건 Y였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껏 봐오면서 J(나의 남편)가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신 걸 본 적이 없었다며 술을 마시고는 엉엉 울었다는 얘기를 했다. 앞 뒷말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의 모든 기억은 희미하지만 남편이 술을 많이 마시고 울었다는 것, 그만큼 힘들어했다는 것만 선명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딸기책방
 
내 슬픔이 너무 커 나의 마음만 생각하느라 남편은 돌아보지 못했다. 유산 후 하루하루 버텨내기에도 버거웠으며 나의 최선은 퇴근하고 돌아오는 그에게 하루 동안 내가 얼마나 전쟁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유산을 우리의 슬픔이 아닌 나의 슬픔으로 간주하고 선을 그어버렸다는 얘기다. 아이를 잃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산은 곧 남편이었다. 또 다른 친구 K는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그때 내가 J한테 얘기했었는데...'라며 어느 교회 목사님 말씀이 좋으니 가보라고 말을 했다. 그 순간의 불쾌함보다도 내게는 내색하지 않지만 나 못지않게 남편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간섭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고 그를 향한 안쓰러움이 컸던 기억이 있다.
 
 『내일은 또 다른 날』가운데,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가운데, 김금숙딸기책방
 
한창 병원에 다니던 시기에 엄마라는 이름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고, 내게 찾아온 생명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았다. 나는 끝이 없는 어둡고 긴 터널 속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줄기 희망처럼 붙잡고 있었던 것은 터널의 끝은 빛이 있을 거라는 거였다. 괴롭고 두려운 시간이었지만 그럴수록 만나게 될 빛은 눈부실 거라고 여기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온전한 '나'로 살아가는 것도 괜찮다


끝이 없을 것 같던 터널을 기어코 빠져나왔다. 그리고 역시나 터널의 끝엔 햇살이 가득했다. 다만, 애초에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엄마'라는 이름이 아닌 온전한 '나'로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다를 뿐.
 
왜 이렇게 아이에게 목을 맬까?
산이 때문일까? 나의 엄마와 그의 부모 때문일까?
더 나이 먹으면 아이를 갖고 싶어도 못 갖는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나도 나를 모르겠다.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 가운데

비행기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70% 이상을 제 항로에서 이탈한다고 한다. 비행 중 기류 등의 영향으로 항로를 벗어나면 재빨리 다시 제자리를 찾고, 다시 벗어나면 또 돌아오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한다고 한다.

처음 출발했을 때의 항로는 벗어났을지 몰라도, 지금 나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인생의 항로를 가는 중이다. 목적지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저 경유지였다고 생각하고, 지금 가는 이 항로에 나를 맡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그 어둡고 막막했던 터널 속이 아니라는 거다. 어느 날은 비가 내리고 또 어느 날은 눈보라가 칠지라도 그저 잠시 지나가는 날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아이 있는 삶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아이 없는 삶도 괜찮다.
-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가운데
 
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처음 기획부터 세상 밖으로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고 말한다. 그 마음을 너무나 이해한다. 나 역시 터널을 벗어나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로 마음먹고 고작 4년이 지났다.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쿵' 하고 돌덩이가 떨어지던 시기는 지났다. 그동안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뒤돌아 눈물을 훔쳐 왔다면, 이제는 차오르는 눈물을 쓴웃음으로라도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시점에 김금숙 작가의 <내일은 또 다른 날>을 만나게 되어 참 반갑다.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딸기책방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내일은 또 다른 날

김금숙 (지은이),
딸기책방, 2023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내일은또다른날 #김금숙 #딸기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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