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쌓여있는 앨범들어린이가 덕질하는 아이돌의 앨범들
이가은
요즘 아이돌의 팬들이 앨범을 사는 것은 들으려고만 사는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그 안에 들어있는 랜덤 포토 카드를 사는 것이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앨범은 들으려고 사는 거지, 듣지도 못하는데(우리 집에는 CD플레이어가 없다) 그걸 왜 사는 거야? 심지어 음악 듣는 앱도 구독하는데?"
"엄마가 몰라서 그래. 요즘에는 다 그래."
앨범뿐만이 아니다. 아이돌을 응원하는 응원봉(매우 자주 품절 상태라 보이면 사야 함)은 기본이고, 연초에는 아이돌 멤버의 사진이 담긴 캘린더와 사진집이 들어있는 시즌 그리팅이, 그리고 멤버의 생일에는 생일 굿즈가 출시된다.
그뿐인가. 그동안의 활동이 담은 DVD와 투어 DVD, 그리고 가끔 있는 콘서트 라이브 영상까지... 정말이지 아이돌의 팬이 된다면 사고 싶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아진다. 그걸 우리 어린이는 설날이나 생일에 받은 용돈으로 플렉스를 해댄다.
어느새 책장 한 켠이 아이돌의 앨범과 굿즈와 사진으로 가득 찼다. 순간, 인터넷 서점에서 주는 굿즈가 너무 탐 나서 필요 이상의 책을 사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던 친정엄마의 말이 확 이해 되었다.
뿐만 아니다. 아이의 최애 아이돌 그룹의 자체 콘텐츠는 매주 월요일마다 업로드 된다. 월요일 9시에는 무조건 그것을 봐야 하는 것이다. 남는 시간엔 틈틈이 그동안 못 본 과거의 영상을 봐야 하고. 아이가 보는 동안 하도 옆에서 같이 보다보니 어느 순간 나도 멤버들의 이름을 다 외울 지경에 이르렀다.
"아니 숙제는 언제 할 거니? 이제 그만 좀 사면 안 될까? 이제 유튜브 그만 좀 봐~!"
이렇게 우리 어린이와 덕질 때문에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가 잦다.
어쩌면 이것은 패러다임의 문제일지도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놀란 것이 하나 있다. 피아노는 다장조부터 시작하는데 바이올린은 가장조부터 배운다. 어릴 때 피아노부터 배워서 다장조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샵과 플랫이 많은 악보를 보면 '아 나는 연주 못해' 하며 지레 겁부터 먹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바이올린은 샵이 세 개나 붙은 악보를 먼저 연주하다니. 그게 기초라니.
악기마다 이렇게 시작이 다르구나. 어쩌면 나와 딸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각각의 악기처럼 다른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으니 아이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내 판단 대로 아이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자. 앨범에는 앨범이지.'
당장 옷장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워크맨을 꺼냈다. 어학공부를 하고 있던 20년 전에 공부 열심히 하라고 선물 받았던 것이었다. 아~ 그런데 워크맨은 있는데 테이프가 없네. 아무리 뒤져봐도 집엔 테이프가 없길래 혹시나 싶어 검색을 해보니 중고 테이프를 파는 스마트 스토어가 있었다. 무슨 앨범을 살까 살펴보다가 발견한 N.EX.T의 2집을 구매했다.
구매하고 이틀 뒤에 테이프가 도착했다.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워크맨에 배터리를 넣고 테이프를 넣었는데 테이프가 돌아가질 않았다. 아무래도 너무 오래되어서 고장이 난 듯했다. 혹시나 해서 검색해 보니 아직도 워크맨을 팔고 있었다.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이왕 이렇게 된 것 나도 워크맨 하나 사서 들어보지 싶어서 저렴한 것으로 워크맨까지 구매 완료.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테이프를 넣고 건전지를 넣고 줄 이어폰으로 내가 듣고 싶었던 곡을 들으려고 했는데...
'아니, 이거 어떻게 쓰더라?'
오랜만에 사용하려니 기억이 잘 안 났다. 뒷면의 맨 마지막 곡을 찾으려고 하니 앞으로 넣었던 테이프를 꺼내 다시 뒤집어 끼워서 앞으로 살짝 돌려서 틀었는데, 곡의 시작 부분을 맞추기가 정말 힘들었다. 이게 원래 이랬나? 힘들게 힘들게 마지막 곡의 플레이를 눌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설은 불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