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사이렌으로 다시 알게 된 현충일의 의미

등록 2023.06.09 08:29수정 2023.06.0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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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 오전, 사이렌 소리에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로부터 며칠 전 새벽에 예고없이 사이렌이 울려 크게 한번 놀랐던 터라 현충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또 한번 덜컹했다.


나는 1960년대 마지막 해에 태어났으니 전쟁과는 거리가 먼 세대이다.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불렀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교과서나 부모님의 경험담으로만 접했을 뿐 특별히 아는 것도,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런 나도 실제로 전쟁의 공포를 느꼈던 적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1983년 새학년의 시작을 앞둔 봄방학의 어느 날, 북한 대위가 전투기를 몰고 우리 상공으로 들어와 전시 상황임을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었다. 느닷없는 사이렌에 아버지는 민방위 모자와 완장을 집어들고 밖으로 뛰쳐나가셨고, 엄마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그런 아버지를 뒤에서 애타게 부르셨었다.

북한 대위의 귀순으로 그날의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지금까지도 당황하시던 부모님의 모습과 공포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머릿속에 깊이 남아있다.

그리고 또 한번은 바로 얼마전인 5월 31일 북한의 우주발사체 발사로 서울 전역에 경계경보 사이렌이 울렸을 때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 잠결에 갑작스럽게 울린 사이렌 소리를 듣고 화재경보기의 오작동인가 잠시 착각했다. 소리가 울려서 잘 들리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언뜻 '실제상황'이라는 단어가 들렸고, TV를 틀어보니 심상치 않은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전쟁이 나면 인터넷부터 끊긴다더니 마침 인터넷 포털사이트도 접속이 되지 않았다.

전쟁이 났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드디어(마침내? 결국?)'였다. 결코 겪고 싶지 않지만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이자 휴전 중인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어쩌면 한번은 겪어야 될 지 모를 전쟁을 드디어 겪게 되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핵실험이니 미사일 발사니 요즘들어 심심치 않게 들려오던 불안한 소식들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제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과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급하게 식구들에게 옷을 입으라 하고, 가방을 챙겼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몰라 생각나는대로 이것저것 쑤셔 넣었다. 속옷과 생수병, 그리고 금반지... 전쟁이 나면 금붙이가 가장 쓸모가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나서 결혼할 때 시어머니께서 해주신 금반지부터 챙겼다.

어디로 피난을 가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머릿속에는 전쟁 직후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보았던 전쟁수용소와 판자촌 길가에 서 있는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전쟁의 이미지는, 친정엄마께 들었던 이야기 때문에 지금 시대와는 전혀 맞지 않는 한국전쟁 때의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우리 엄마는 북쪽이 고향이신 실향민이다. 열두 살에 오빠와 둘이서 남쪽으로 피난 내려와 오빠는 병으로 죽고 혼자 남아 온갖 고생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딸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엄마가 전쟁 때문에 하루아침에 수용소에서 배급을 타 먹으며 살아야 하는 전쟁고아가 되었으니 엄마에게 전쟁은 모든 걸 앗아간 가장 무섭고 끔찍한 사건이었다. 아주 잠깐의 해프닝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정신이 아득해지는데, 엄마는 어린 나이에 그 수많은 밤을 혼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동안은 전쟁은 남의 일이었다. 어른들이 하시는 전쟁 때 이야기는 '나 때는 말이야'처럼 고리타분하게만 느껴졌었다. 우스갯소리들이 오고가는 편한 자리에서 '전쟁'이라는 단어를 농담거리로 삼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전쟁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평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관계나 주변 국가와의 관계를 이끌어나가는 정책들도 많이 바뀌는 듯하다. 도보다리에서 남북 정상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보면서 안도감과 희망을 느끼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전쟁으로 이어질 듯한 원색적인 비난 메시지가 오고가는 상황을 보면서는 불안함과 공포가 느껴지기도 했다.

정치에 문외한이지만, 나라의 가장 근간이 되는 국가안보가 때때로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이용되는 걸 보면 참 안타깝다. 지금도 전쟁중인 나라들을 지켜보며 어떠한 이유에서도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은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된다.

비록 오발령이었지만 새벽에 울린 사이렌으로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는 현충일의 의미가 새삼 다르게 다가왔고, 지금 누리는 평화와 평안에 더없이 감사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순국선열들께 뒤늦은 묵념을 드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 스토리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현충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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