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묵상하며 걷기 좋은 길

배순을 기리며 죽계구곡을 걷다

등록 2023.06.23 10:41수정 2023.06.23 11:30
0
원고료로 응원
a

죽계구곡길 경북 영주시 순흥면 배점주차장을 출발해 초암사 근처에 이르는 죽계구곡길은 생각하며 걷기 좋은 코스다 ⓒ 이보환


소파에 누워 뒹굴기 좋은 휴일 오후, 파란 하늘에 이글거리는 볕이 나를 일어나게 했다. 지난 11일 주섬주섬 편안한 옷차림에 물 한 병만 챙겨 나섰다. 

산수(山水)를 즐겨찾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떠올랐다. 그렇게 갑자기 나서게 된 길이 경북 영주시 순흥면의 죽계구곡길이다. 소백산 국망봉에서 초암으로 흐르는 물이 소수서원 취한대로 이어지는데 그 냇물이 죽계천이다.


죽계구곡 옛길은 자연경관만 빼어난 곳이 아니라 옛 선현들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태, 문화, 역사가 어우러진 아홉구비다. 배점마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간단한 체조로 몸을 풀었다. 출발전 구곡의 이름을 검색해본다. 퇴계 이황이 계곡의 절경과 물흐르는 소리에 감탄하며 계곡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구곡의 이름을 살펴보면 1곡 금당반석(金堂盤石)을 시작으로 2곡 청운대(靑雲臺), 3곡 척수대(滌愁臺), 4곡 용추비폭(龍湫飛瀑), 5곡 청련동애(靑蓮東崖), 6곡 목욕담(沐浴潭), 7곡 탁영담(濯纓潭), 8곡 관란대(觀瀾臺), 9곡 이화동(梨花洞)이다. 

계곡마다 담고 있는 이름이 자연과 얼마나 조화를 이룰까하는 궁금증이 안내도를 보는 둥 마는 둥 발길을 재촉했다.​
 
a

배점마을 유래 배순의 대장간이 있어 지금까지 배점마을로 전해지는 곳이다. 배순은 대장장이였지만 학문에 심취했고 평생 동안 자신의 생각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인물 ⓒ 이보환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순의 대장간을 알리는 안내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배순(1534년생) 선생은 농기구를 만든 대장장이다. 지금이야 장인 또는 명장 칭호까지 받았겠지만 당시에는 천한 신분의 소유자였다. 소수서원을 지을 때는 철물을 납품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퇴계 선생이 소수서원에서 강의할 때 강학당 밖에서 몰래 공부했는데, 그의 정성을 높이 평가한 퇴계 선생이 제자로 맞았다. 퇴계의 제자 309명을 수록한 '급문제현록'에 배순의 이름이 올라있다.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선조 임금 승하 때도 상복을 입고 국망봉에 올라 도성을 향해 곡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성리학의 핵심인 경(敬)사상을 실천한 참된 학자요, 충과 효의 모범을 보인 인물이었다.


그가 대장간을 운영했다고 해서 동네 이름이 배점마을이다. 단곡 곽진은 배순정려비문에 "참된 충과 참된 효는 오직 배순뿐이다(純忠純孝惟純耳)"고 썼다. 영주의 문인이자 사회운동가인 권서각 선생은 그의 산문집 이름을 '대장장이 성자(어느 변방 시인의 기억 창고)로 지었다.

대장장이 신분이지만 죽을 때까지 유학적 실천을 행한 배순을 본받겠다는 작가의 뜻이 숨어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인품 훌륭한 그의 대장간이 궁금해졌다. 죽계구곡길을 따라가면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생겼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히 구곡이라 적힌 방향대로 걸었는데 마을 끝 지점이 나타났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뒷짐을 한 어르신이 인기척을 한다.

"어르신, 여기 죽계구곡 가는 길이 어딘가요?"
"여기 아닌데 잘못왔어, 저기 주차장에서 주차하고 저 길로 가야돼."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배순 대장간은 어디쯤일까요?" 
"저어기 산중턱이야. 요즘은 사람이 없으니 길 묻기도 힘들지?" 


그러고보니 보이는건 전부 사과나무밭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 가며 안내판을 다시 확인했다. 마을 아래에서 도로 위로 올라가니 쨍쨍한 볕이 온몸을 달군다. 얼려간 물을 연거푸 마셨다. 드디어 죽계구곡 탐방로를 알려주는 입구에 도착했다. 배점주차장에서 이곳까지 대략 1.4㎞를 걸었다. ​

죽계구곡길을 알려주는 문을 통과하니 울창한 숲이 반겨준다. 나무가 만들어준 그늘길에 땀방울이 행방을 감췄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찰떡궁합이다. 상쾌한 숲이 지휘자가 되어 웅장한 자연의 소리를 모두 담아낸다. 숲내음에 깊은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딱 봐도 구곡중 하나일 듯한 경관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8곡 관란대다. 희고 긴 머리를 풀어헤친 듯 가느다란 물줄기가 퍼져 흐른다. 물소리가 우렁 차고 물살이 제법 빠르다. 한여름에 와도 시원하겠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인다.

7곡을 찾아가는 걸음이 살랑이는 나뭇잎처럼 가볍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둑해지는 듯하더니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진다. 이내 거짓말처럼 다시 맑아진다. 바위에 새겨진 七曲(구곡) 글자가 반갑게 맞아준다. 탁영담이다. 탁영담에는 퇴계 이황이 글감으로 삼았던 '반타석'이 존재한다.

누런 탁류 넘실댈 때는 형체를 숨기더니
黃濁滔滔便隱形(황탁도도편은형)
고요히 흐를 때면 비로소 분명히 나타나네
安流帖帖始分明(안류첩첩시분명)
아름답다! 이처럼 치고 받는 물결 속에서도
可憐如許奔衝裏(가련여허분충리)
천고에 반타석은 구르거나 기울지도 않네
千古盤陀不轉傾(천고반타부전경)
찰칵찰칵 마음의 셔터가 바빠졌다. 


흐르는 계곡물이 바위를 뚫을 기세다. 기운찬 물줄기가 고요한 숲으로 스며든다. 전망대처럼 널찍한 데크 위에 서니 선녀와 어울리는 꼭꼭 숨은 소(沼)가 있다. 6곡 목욕담이다. 첨벙 뛰어들어가고픈 마음을 살살 달래본다. 진한 초록빛깔이 우렁찬 물소리를 감싼다. 숲길이 차분해졌다. 웅웅거리는 산벌레의 합창소리가 5곡 청련동애에 닿았다.

五曲(구곡)이 새겨진 바위 위로 누군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듯한 홈이 인상깊다. 계곡물이 맑아 속이 훤히 보인다. 속 보이는 계곡이 마음에 쏙 든다. 4곡 용추는 검푸른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는 깊은 못 가운데 큰 바위로 누워 있다. 마치 용이 구름비를 뿜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물줄기가 크진 않지만 소리는 거세다. 용(龍)이 주는 기운이 나를 당당하게 한다.

3곡 청수대를 찍고 2곡 청운대 앞에 섰다. 덩치 큰 바위가 우뚝 서서 흐르는 물을 호령하고 있다. 마지막 1곡 금당반석이다. 넓고 평평한 큰 바위의 위엄에 순간적으로 엄숙함까지 느껴졌다.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한 물이 산자락을 타고 내려오면서 폭포와 소를 이룬 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람들이 모여 각각의 집단을 이루고 다양한 모습도 연출하는 것처럼. ​

죽계구곡에 자리한 초암사는 고즈넉하다.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라고 한다. 태양이 초암사를 붉게 물들인다. 경내에 만발한 연분홍 철쭉이 엄숙한 사찰을 들뜨게 한다. 

배점 주차장으로 가던 중 마을 어귀의 구곡안내판이 아홉 번째 주인공임을 알게 되었다. '아. 이게 9곡이었구나!' 새로 놓은 다리와 풀숲에 가려져 볼 수 없었다. 들머리에 있던 9곡 이화동을 찾는 것으로 죽계구곡길을 마무리했다. 이 길은 급히 갈 곳이 아니다. 예전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치를 보며 묵상하면 좋겠다. 사람과 사람, 부모와 자식, 국가와 공동체 등 여러 관계를 생각하면서 걸어봄직하다.
 
a

초암사 초암사는 죽계구곡의 1곡 금당반석 바로 아래에 있다.소백산을 오를 때 국망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자리했다 ⓒ 이보환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제천단양뉴스(http://www.jdnews.kr/)에 실립니다
#제천단양뉴스 #이보환 #단양 #영주 #초암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충청권 신문에서 25년 정도 근무했습니다. 2020년 12월부터 인터넷신문 '제천단양뉴스'를 운영합니다. 지역의 사랑방 역할을 다짐합니다. 언론-시민사회-의회가 함께 지역자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퇴직한 제가 실천한 '저속노화' 방법, 이것이었습니다
  2. 2 선거하느라 나라 거덜 낼 판... 보수언론도 윤 대통령에 경악
  3. 3 맥아더가 월미도에서 저지른 과오... 그는 영웅이 될 수 없다
  4. 4 "일본은 지상낙원"... 유명 소설가의 거침없던 친일
  5. 5 군사보호구역 해제 파동, 참 큰일 낼 대통령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