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8월에 평양 대동강을 침입했던 미 상선 제너럴셔먼호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김옥균은 성장하면서 여러 면에서 우수성을 보였다. 천부적인 자질에다 양부의 넉넉한 인품에서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웠다. 양부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그도 함께하였다. 그는 학문·시문·글씨·그림·음률 등에서 크게 향상되어 돌아왔다. 부자 마을 서울 북촌에 살면서 더욱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가 서울로 돌아온 1866년 7월 제너럴 셔먼호사건이 일어났다.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 인근까지 들어왔다. 아직 양국간에 국교가 열리기 전이라 불법 침입이었다.
대포 2문을 비롯하여 중무장한 배에는 24명이 타고 있었다. 대동강 입구에서 황주목사 정대식은 이들에게 조난선의 예로 대우하여 식량과 땔감을 주었다. 그리고 통상은 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니 물러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제너럴 셔먼호는 이를 무시하고 멋대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그들은 육지를 향해 발포하여 백성들을 살상했고, 밤에 상륙해서는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중군 이현익 등을 납치했다. 평양서윤 신태정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하여 석방을 요구했으나 교환 조건으로 쌀 1000석과 많은 양의 금·은·인삼 등을 요구하여 협상은 결렬되었다.
퇴역 장교 임춘전의 활약으로 이현익은 구출되었으나 나머지 2명은 살해되고 말았다. 이에 평양감사 박규수(朴珪壽)는 제너럴 셔먼호를 응징할 대책을 강구했다. 때마침 장마가 그쳐 물이 줄어들자 제너럴 셔먼호는 모래 위에 얹혀 꼼짝할 수 없었다. 이때 평양의 군인과 백성들이 장작을 실은 배를 상류에서 떠내려 보내 제너럴 셔먼호에 접근시켜 화공(火攻)을 개시했다. 결국 제너럴 셔먼호는 불탔고, 살아남은 선원은 끌려 내려와 타살당했다.
1870년 미국의 그란트 대통령은 이 사건의 보복으로 조선침략 원정안을 승인했는데, 그것이 이른바 신미양요다.
9월에는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 벨로네는 1866년 초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서 처형된 소식을 들었다. 그는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 공격을 명령했다. 로즈는 3척의 군함으로 8월 18일에 1차 침입해 마포 서강까지 올라와서 수로를 관측했다. 그리고 9월 5일 군함 7척과 병력 600여 명으로 2차 침입하여 강화도를 점령했다.
프랑스군은 "선교사 9명을 처형한 대가로 조선인 9000명을 죽일 것"이라 위협하면서 배상과 함께 사건을 주모한 조정대신의 처벌, 통상조약 체결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원군이 선교사의 처단은 국법에 따른 것이므로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부, 전투 의사를 밝혔다. 그러던 중 양헌수는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 내의 정족산성에 침투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그들은 강화도 점령 한 달 만에 철수했다. 이때 대량의 외규장각 도서와 금괴·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후 조선에서는 천주교 탄압이 더욱 심해지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15세 전후하여 이같은 외세의 침략 소식을 알게 된 김옥균은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일반 청소년들에 비해 영민하고 다양한 독서를 통해 지식의 폭이 넓었던 그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김옥균이 강릉을 떠나던 1866년에 온 나라에 격동적 영향을 미친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는바 그것은 미국해적선 '셔먼호'의 침입사건과 불란서 함대의 무력침공사건이었다. 구미자본주의의 침략을 반대하는 전민족적 투쟁의 심각한 영향하에서 김옥균은 조국에 도래한 민족적 위기를 자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위기를 당하고도 부패와 타락만이 가중해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을 애타게 우려하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역사적 전환기에 놓인 환경에서 자란 김옥균의 사상 속에는 조국의 위기를 구원하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열렬한 지향이 씩씩하게 자라났으며 이러한 지향은 그로 하여금 당시 강한 생활력을 가지고 흐르고 있던 실학의 진보적 사조를 불타는 정열을 가지고 연구하게 하였다. (주석 4)
주석
4> 앞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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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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