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정원의 메인트리가 단풍에서 적송으로 옮겨온 느낌이다
유신준
사부와 정성을 다해 손질한 적송 가지가 부지런히 새 눈을 내밀고 있었다. 발그스레한 피부에 여리디 여린 연초록 새 눈을 밀어올리는 품새가 영낙없이 성장한 여인이다. 여인송이라는 별명이 있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사부정원의 메인트리가 단풍에서 적송으로 옮겨온 느낌이랄까. 첫날 사부가 말했었다.
다들 적송을 메인트리로 심지. 비싸고 귀한 나무거든. 나는 일부러 비켜 세웠어. 대신 남들이 보조수로 심는 단풍을 메인트리로 세웠지. 나한테는 귀한 나무거든. 적송은 입구에서 모습을 비치고 나면 역할이 끝이야. 응접실에서 정면으로 돋보이는 건 단풍이거든.
메인트리 단풍은 그사이 녹음 속에 묻혀 버렸다. 핑크에서 연초록으로 변화를 거듭하며 정원의 주역으로 빛나던 봄날이 가버린 거다. 이제 손질을 끝낸 적송이 슬그머니 돋보이기 시작하는 여름이 시작됐다.
그녀도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풍경속으로 녹아들겠지. 가을이 되면 붉디 붉은 단풍이 왕좌자리를 되찾게 되는 것처럼. 작은 사부정원 안에서도 서로 경쟁하며 아우르는 나무들로 계절의 변화를 흠씬 누린다. 풍부한 계절감은 일본정원의 큰 특징이기도 하다.
사부가 수술 마무리 때문에 오늘도 병원에 다녀오셨다며 쌓인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굉장히 무섭더라. 다른 곳도 아니고 눈이잖아. 일은 할 만큼 해봤으니 괜찮은데 재미있는 골프를 못하게 되면 안 되잖아. 손을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손바닥에 땀이 났었어. 수술 시간 이십 분이 두 시간 같더라.
나는 대개 듣는 역할이다. 짬밥에 밀려 여기서만 그러는 게 아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듣는 걸 좋아한다. 밑밥 때문에 한층 돈독해진 한일 사제는 그동안 쌓인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려워서 말도 못 부칠 때에 비하면 이제는 관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