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북한 접경지역 압록강 주변에서 보이는 북한 마을 풍경. 현지 가이드 말에 따르면 최근에 3~4년 사이 새롭게 지어진 살림집들이 많다고 한다.
유성애
답사 6일차, 저녁식사로 북한 여성들이 일하는 중국 식당에 간 것도 기억에 남는다. 큰 식당 안에서 왼쪽 절반은 중국인, 오른쪽 반은 한국인이었는데, 식사 중 제공되는 공연시간에 북한 여종업원들이 중국 관객을 상대로 '오성홍기(중국 국기) 찬란한 미래'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와 드럼·피아노 연주 등 이들 공연을 집중해서 지켜보는 남한 관객들과는 달리 중국 관객은 담배를 피우고, 심드렁한 표정과 불량한 자세로 공연을 봤다(공연 촬영을 금지한다고 식당 측에서 미리 고지를 했는데도, 대놓고 휴대폰으로 녹화하는 남성도 있었다).
지난해 대학원 과제를 하다가 현재 내 배우자의 이름과 같은 이름의 북한 저자가 쓴 논문을 읽고 인용하게 된 적이 있다. 어쩌면 북한 2500여만 주민들 중에는 내 이름과 똑같은 이름으로 평생 불리는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성별을 택할 수 없고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 태어날 지역을 정할 수도 없는 일인데.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인 여종업원들, 그러니 저들 자리에는 어쩌면 내가 서 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코끝이 찡해져 왔다.
정치상황 탓에 인적 교류가 막혀 남북한 주민이 만나지조차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 그래서 중국이라는 제3지역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그날 공연을 지켜보던 내 감정을 복잡하게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 같다.
황해도가 고향인 필자의 시조부모 포함, 나고 자란 고향을 인근에 두고도 가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있는 실향민과 이산가족 문제는 또 말해 무엇하나(관련 기사:
'희망고문' 된 이산가족 상봉, 실향민에겐 시간이 없다 https://omn.kr/24pp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