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명가는 암살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닌다.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다르지 않다. 성공하면 동지간에 또는 외세에 의해, 실패하면 상대측에 의해 죽음(죽임)이 따라 다닌다. 대표적인 사례는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와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가 있다. 전자는 동지에 의해, 후자는 외세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옥균을 암살한 자는 홍종우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는 조ㆍ중ㆍ일 3국의 합작품이었다. 결과적으로 가장 큰 혜택을 입은 것은 일본이다.
조선인 홍종우에 의한 김옥균 암살사건 결과, 가장 크게 '덕'을 본 것은 일본이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곧 김옥균이 상하이에서 암살되고 또 그 시체가 범인 홍종우와 더불어 조선에 인도되어, 시체는 능지처참 당하고 홍종우는 환대를 받게 되었다.
이에 일본의 조야는 조선정부와 청국정부의 암살사건 자체에 대한 관련책임(일본의 주권침해 등)과 더불어 사후 처리의 부당성과 '야만성'을 지적하며, 그것이 일본에 대한 모욕이자 주권침해라는 이유를 들고 나와, 한껏 반청ㆍ반한의 분위기를 북돋우고, 드디어는 대청 개전론으로 국론을 통일시켰다. (주석 19)
김옥균이 '삼화주의'를 구상하면서 청국의 실력자들과 담판을 하기로 준비하던 1894년 2월 전라도 무장에서 전봉준ㆍ손화중ㆍ김개남 등 농민지도자들의 동학혁명이 전개되었다. 이들은〈창의문〉에서 선언했다. "어찌 국가의 존망을 앉아서 보기만 하겠는가. 8도가 마음을 합하고 수많은 백성이 뜻을 모아 이제 의로운 깃발을 들어 보국안민으로써 사생의 맹세를 하노니, 금일의 광정은 비록 놀랄 만한 일이기는 하나 경동하지 말고……."
10년 전 개화파들이 시도했던 거사의 목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옥균의 긴 망명기간에 조선에서는 민중의 각성이 크게 이루어지면서 도처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다. 비록 갑신정변은 좌절되었으나 자신들이 추구했던 개혁의 씨앗은 척박한 산야에서 새록새록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이같은 소식을 듣게 된 김옥균은 무엇보다 동양평화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위해 나섰다가 참변을 당하고 시신은 갈갈이 찢기어 전국 8도에 효시되었다. 이때 천안감옥에 갇혔던 생부 김병태도 사형이 집행되었다.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사된 김옥균의 시신은 사라지고, 일본에서 그를 추모하기 위해 결성된 '김옥균 우인회(友人會)'가 김옥균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입수하여 1894년 5월 20일 도쿄 혼간지(本願寺)에서 별도의 장례식을 치르고 묘지를 만들었다.
10년이 지난 1904년 2월 18일 유길준이 짓고 박영효가 찬했으며 이준용이 쓴 비문이 새겨졌다. 이준용은 대원군의 장손이다. 비문 중 일부를 소개한다.
오호라 비상한 재주를 타고나
비상한 시대를 만났으며
비상한 공적을 이루지 못하고
비상한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하늘이 김 공을 낳은 것이 이와 같도다
뜻이 크고 뛰어나
작은 일에 개의치 않고
착한 일을 보면 자기 일같이 여기고
호쾌한 의협심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안는 것이
공의 성품이다
걸출하고 당당하게 우뚝 서서
소신껏 행동하고
백 번 꺾여도 굴하지 아니하며
천만번 그 길을 다시 가는 것이
공의 기상이어라.… (주석 20)
주석
19> 김영작, 앞의 책, 302쪽.
20> 안승일, 앞의 책, 2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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