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와 욱이
박복순씨 제공
하지만 박씨는 입양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손주뻘 되는 아이를 자식으로 삼을 자신도 없었지만 자신이 원장으로 있는 시설에서 자란 아이를 입양해서 자식처럼 키울 자신은 더욱이나 없었다. 그녀에게는 다른 두려움도 있었다.
3년 전 목도리로 얼굴을 칭칭 감싼 채로 욱이를 시설에 놓고 간 생모가 언제든 다시 찾아와 아이를 달라할 것 같았다.
선량하고 따뜻한 남편은 아내 박복순씨에게 입양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남편의 바람에 따라 욱이의 입양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두려움을 완전히 이겨낸 결과는 아니었다. 그때는 그저 그랬어야 했다.
그 해 7월에 입양신청을 했고 다음 해인 2016년 3월 확정 판결을 받았다. 보육원 아이였던 욱이는 그녀 아들이 됐다. 3년을 주말마다 집을 오고갔어도 시설에서의 집단생활이 남긴 생채기는 욱이에게 뚜렸했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건 다 네 것이야... 그래도
욱이는 냉장고에 집착했다. 시설에 있을 때 방에 냉장고가 있었지만 그 문을 열 수 있는 권한은 보육사 선생님에게만 있었다. 그래야 시설에서의 집단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집에 와서도 욱이는 혼자 냉장고 문을 열지 않고 엄마에게 꺼내 달라고 했다. 대신 욱이는 냉장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 안에 있는 건 다 네 것이라고, 언제든지 먹고 싶을 때 문을 열고 꺼내 먹으면 된다고 말해도 그 쉬운 것을 하지 못했다. 냉장고 문 하나 마음대로 열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면서도 자정 가까운 시간에 우유 하나 꺼내 달라는 말에는 화딱지도 났다.
게다가 욱이는 거의 매일 이불에 오줌을 지렸다.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다섯 번도 이불을 갈아 주기도 했다. 하는 수없이 방수커버를 침대에 씌웠다. 집이 생겼고 엄마아빠를 마음대로 부를 수 있어 너무 좋지만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욱이는 자신이 입양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시설에 오게 된 경위도 물론이었다. 말하자면 다시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함의 발로였다. 오줌 지리는 습관은 초등학교 2학년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다.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고 있었다.
욱이는 학교 가기 전 나이였을 때 "낳아 준 엄마를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 때마다 좀 더 크면 꼭 같이 찾아보자고 대답해줬다. 그런 욱이가 어느 날은 자신이 시설에 맡겨진 이유가 '기저귀 살 돈이 없어서였을 거'라는 말을 했다. 저를 낳은 엄마에게 어쩔 수 없었던 아름다운 사연이 필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또 안쓰러웠다.
결혼해 분가한 딸은 욱이가 나중에 자기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걸 알고 받아들였다. 고맙게 사위도 마찬가지다. 욱이에게는 아빠 같은 매형이고 사위에게는 아들 같은 처남이다. 입양이 맺어 준 인연이고 가족이다.
처음 집에 왔을 때 우리 나이로 겨우 네 살 먹은 아이가 혼자 샤워를 했다. 여느 또래 아이 답지않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명색이 보육원 원장이었는데 아이들 면면을 다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런 아이가 지금은 매번 씻겨줘야 하는 5학년 아이로 변했다.
모름지기 아이라면 그 일상을 부모와 가족이 주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채워야 한다. 욱이는 지금은 누가보아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신뢰의 붕괴 그리고 또다른 신뢰의 회복
그녀가 시설에서 원장으로 있을 때, 아이를 맡겨 놓고 나중에 와서는 돈을 꿔달라는 부모가 여럿 있었다. 대개 아이를 맡긴 후 연락이 끊어지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크리스마스에 온다는 약속을 남기고 떠난 아빠를 기다리는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도록 아빠는 오지 않았다. 기다림이 사무쳐 자살 충동까지 이르게 된 아이와 함께 병원을 다녔었다. 다음에 온다는 부모 약속은 시설에 남겨진 아이에게는 오로지 살아가는 이유였다. 오겠다는 그 즈음이 되면 아이들은 담장 밖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송곳이 돼 아이 가슴을 찔렀다.
그런 경험이 있는 아이들에게 신뢰라는 단어는 힘을 잃었다. 그들이 신뢰를 다시 되찾는데는 더 많은 상실과 믿음에 대한 부단한 도전이 필요했다. 친권이 있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큰 상실과 불신의 경험을 겪어야 했다.
처음부터 아예 친권이 없던 아이들은 이른 포기를 했지만 있는 아이들에게 포기를 먼저 가르칠 수는 없었다. 그런 마음들이 한데 모여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불신이라는 굴레를 씌웠다.
욱이가 시설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부모에 대한 신뢰를 확신하는 데는 5년 여의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거기에서의 생채기가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박씨가 욱이를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낳든 입양하든 한 번 자식으로 삼으면 그냥 자식이었다. 이건 전혀 별개의 사건이고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다. 그녀가 원장으로 있던 보육원에 생모가 놓고 간 아이가 욱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이 진실은 그대로 진실이되 그녀에게 욱이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라는 사실 또한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다.
입양은 가족이 되는 또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