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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고 돌아 고국 왔지만... 3대는 나란히 묻히지 못했다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4] 독립운동에 힘쓴 이상룡 일가

등록 2023.09.24 11:33수정 2023.09.2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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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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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항공사진. 노란색 네모 칸이 이상룡(21호), 이봉희(22호), 이광민(23호), 이승화(24호)의 묘다. ⓒ 임재근

  
1990년 9월 13일,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고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의 유해가 광복 45년 만에 고국으로 봉환됐습니다.

국무령은 지금으로 말하면 대통령에 해당하는데요, '임시정부 대통령'의 유해가 고국으로 봉환되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때까지 국외로부터 봉환된 애국선열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돌아온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선생을 비롯해 1975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봉환된 이준 열사 등 13위에 불과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1858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구한말엔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경술국치로 나라를 완전히 빼앗기자 1911년 1월,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안동을 떠나면서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들을 해방시켰고, 고성이씨 가문의 99칸 종가집 임청각(臨淸閣)을 비롯해 밭과 논을 모두 팔아 독립운동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이 만주로 망명길에 오를 때 쉰 살이 넘은 나이는 당시로는 고령에 속했습니다.

선생은 만주에서 이회영·이동녕 등과 함께 벼농사를 보급하는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했습니다. 이어 경학사 산하로 독립군양성기관 신흥강습소 설립에 나섰습니다.

독립 후 45년 지나서야 지킨 선생의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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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학사와 신흥강습소가 설립되었던 중국 유하현 삼원포의 추가촌 지역. 지금은 신흥강습소의 흔적은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벽돌공장(왼쪽)과 옥수수 밭으로 변해 있었다. 오른쪽 산은 대고산이다. ⓒ 임재근

  
1911년 6월 10일에 유하현 삼원포의 추가촌의 한 허름한 옥수수 창고에서 설립된 신흥강습소는 몇 차례 이전을 하며 신흥학교,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습니다. 이후 군사교육기관으로서 자리 잡으며 수많은 독립군을 길러냈습니다.

맨 처음에 학교가 아닌 강습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것은 토착민들과 일제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초대 경학사 사장으로 추대되었고,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이시영, 이동녕 선생에 이어 교장을 맡았습니다. 1919년에 독립군정부 성격의 서로군정서가 조직되자 최고 책임자(독판)를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으며 본격적인 항일무장투쟁에 나섰습니다.

선생은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 대통령의 탄핵 이후 대통령제에서 국무령제로 바뀌면서 1925년 7월부터 1926년 2월까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며 민족 간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령을 사임한 후에도 서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 소성자에서 7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선생은 "나라를 찾기 전에는 내 유골을 고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는데, 우리는 선생의 유언을 나라를 찾고 난 뒤 45년이 지나서야 지킬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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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된 이상룡 일가의 묘. 왼쪽 첫 번째는 이상룡의 유해가 이장된 후 그 자리에 묻힌 의병장 권득수의 묘. 그 다음부터 이봉희(22호), 이광민(23호), 이승화(24호), 이준형(25호), 이병화와 허은 부부(26호)의 묘이다. ⓒ 임재근

  
이상룡 선생의 유해는 해방 전에 길림성 서란현에서 북만주 항일운동의 근거지 흑룡강성 아성시 취원장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이후 취원창에 함께 묻혀 있던 동생 이봉희, 조카 이광민 부부, 당숙 이승화의 유해가 선생의 유해와 함께 고국으로 봉환되었습니다.

1990년 9월 13일에 봉환된 유해는 동작동 국립묘지(서울현충원)에 임시 안치됐다가 한 달 쯤 지난 10월 11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1년여쯤 지난 1991년 11월 14일에 안동에 묻혀 있던 이상룡 선생의 아들 이준형과 손자 이병화의 유해도 이들 옆으로 옮겨오면서 이상룡 선생의 3대를 비롯해 집안사람들의 묘 여러 개가 함께 국립묘지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현충원에 임시정부요인 묘역이 조성되면서 이상룡 선생의 묘는 1996년 5월 21일에 서울현충원으로 이장되었습니다. 이로서 3대가 함께 묻혀 있던 시간은 5년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선생부터 손자, 손부까지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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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 나서 서훈을 받은 이상룡 일가의 가계도 ⓒ 임재근

 
이상룡 선생 집안에서는 선생을 포함해 동생, 아들, 조카 등 여러 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상룡 선생의 첫째 동생 이상동은 1919년 3월 13일 안동읍 장날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월 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둘째 동생 이봉희는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협동학교 설립에 참여하며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상룡 선생과 만주로 망명한 이봉희는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썼습니다.

1919년 서로군정서 창설요원으로 활동했고, 이듬해인 1920년에 광복단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 정부 등과 교섭해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냈습니다. 화룡현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에 나서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에서 사망했습니다.

당숙 이승화는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상룡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가 1915년에는 국내에 들어와 충청남도·경상도·경기도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던 중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출옥한 뒤에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조카 이광민(동생 이봉희의 아들)은 1915년 백부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신흥학교를 수료한 후 동화학교 교원으로 청소년 교육에 힘을 쏟았습니다. 1924년 7월 소집된 전만통일회 주비회발기회에 군정치 대표로 활동했고, 1926년 1월에는 정의부 중앙위원 겸 법무위원장으로 취임해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삼부통합을 위해 김동삼, 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 활동했습니다.

조카 이형국(동생 이상동의 아들)도 1911년 백부 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1913년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국내에 잠입하여 신흥사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7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형국은 1924년 신간회 안동지회를 조직해 교육부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또 다른 조카 이운형(이형국의 동생)도 1918년 만주에서 김동삼·이청천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1919년 3·1독립운동 때에는 탑골공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했습니다. 그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 결성에 힘썼으며,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이 되어 국내에 출입하다가 일경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선생의 아들 이준형은 1911년 1월 5일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해 경학사 설립을 도왔습니다. 1919년 11월에는 서로군정서의 독판이던 부친의 활동을 보좌하며 활동했고, 1925년 1월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길림성 화전현 일대에서 활동했습니다.

이준형은 1932년 부친의 장례를 지낸 뒤에 신주를 집으로 모시며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귀향한 후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국운을 비관한 이준형은 1942년 9월 2일 자결해 생을 마쳤습니다.

손자 이병화(이준형의 아들)는 1916년 조부 이상룡을 따라 부친 이준형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1921년 무장투쟁단체인 통의부가 조직되자 가입해 활동했고, 그해 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순사를 살해한 후 귀대하였는데, 한참 지난 1934년 5월에 주재소 습격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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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2호에 합장으로 안장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국무령 이상룡과 애국지사 김우락의 묘. ⓒ 임재근

  
부인 김우락도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뒤 1932년 귀국할 때까지 경학사, 부민단,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을 이끌었던 남편 이상룡을 도와 독립운동을 지원했습니다.

손부 허은(이병화의 부인)은 1922년 이상룡의 손자 이병화와 결혼한 뒤 1932년 귀국할 때까지 서로군정서의 기본적인 생계 활동을 비롯해 회의 등 공식적인 행사를 준비하는 데 힘을 보태며 살림을 맡았습니다. 또한 서로군정서 대원들이 입을 군복을 만들고 배급하며 무장투쟁 활동에 기여했습니다.
    
정부에서는 이상룡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1990년에는 첫째 동생 이상동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 둘째 동생 이봉희 독립장, 아들 이준형 애국장, 당숙 이승화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 조카 이형국과 이운형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 조카 이광민 독립장, 손자 이병화 독립장을 추서했습니다.

2018년에는 손부 허은이 애족장을, 2019년도에는 부인 김우락이 애족장을 추서 받았는데, 한 집안에서 이같이 많은 사람이 국가의 서훈을 받은 것은 드문 일입니다. 이상룡의 종고모부 김도화(1825-1912), 사위 강호석(1895~1950), 매부 박경종(1875~1938)도 애족장을 추서 받았고, 이상룡의 동생 이상동의 사위 김태동(1897~1982)도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동생 이봉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22호에, 조카 이광민은 23호, 당숙 이승화 24호, 아들 이준형은 25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손자 이병화와 손부 허은 부부는 26호에 합장되어 있고, 동생 이상동은 조금 떨어진 독립유공자 제1묘역 106호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조카 이형국은 대전현충원 내 다른 묘역인 독립유공자 제3묘역 348호에 안장되어 있고, 또 다른 조카 이운형의 묘는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룡 선생과 부인 김우락 지사의 묘는 대전현충원에서 이장되어 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2호에 합장으로 안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대전현충원에서 이상룡 선생의 묘가 자리했던 독립유공자 제1묘역 21번에는 1907년 양주·이천·지평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순국한 권득수 의병장이 2005년 5월 19일에 안장되었습니다.

이때는 대전현충원을 국가보훈부(옛 국가보훈처)가 아닌 국방부에서 관리하던 시절이었는데, 국가보훈부에서 관리를 하면서는 이장한 자리에 다른 이의 묘가 들어서는 경우는 없이 빈자리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 #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묘역 2호 #이상룡 #대전현충원 #신흥강습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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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북한학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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