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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문, 유희왕 비닐 북커버야 반가워

20여 년간 책 읽는 습관을 가져다 준 고마운 북커버

등록 2023.10.04 16:15수정 2023.10.05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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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커버 쓰고 싶어서 책을 읽게 된 사람이 있을까?


있다. 그게 나다. 나는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닐 때, 다른 소지품으로 인해 표지가 찢어지거나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북커버를 씌운다. 가방에 매일 다른 온갖 문구들이 들어가는 나로서는 책을 보호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북커버의 역사는 20여 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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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문 북커버 ⓒ 박유정

 
지난 기사들에서 이야기 하고 있듯, 나는 고전문구 수집가다. 수집가가 된 이상 그 사람은 맥시멀리스트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다. 나도 현재 맥시멀 세계의 '시민' 정도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가하면 내 주변엔 미니멀리스트계의 왕으로 유력한 사람도 있는데 그게 바로 우리 엄마이다. 엄마는 나를 제외한 쓸데없는 모든 것을 싫어하고, 나는 온 세상의 쓸데없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이렇게 성향이 다른 부모님과의 성장 과정은 그게 행복이든 불행이든 투쟁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오늘의 투쟁은 교과서. 정확히 말하면 그 교과서를 싸는 비닐 커버이다. 나보다 더 윗 세대에서는 책이 귀했기 때문에 깔끔하게 쓰기 위해 종이로 책 커버를 만들었다고 한다. 동생들에게 물려주어야 했기 때문에.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새학기 첫날이 되면 학교에서 교과서를 무상으로 모두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책커버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교육 과정이 바뀌어 책이 바뀌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하지만 우리 반 대부분의 아이들은 교과서에 커버를 씌웠다. 그때 당시에는 북커버가 아니라 책비닐이라고 부르긴 했는데 어쨌든, 그 이유는 순전히 멋을 위해서였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는 교과서 크기가 거의 똑같았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는 그 크기에 맞는 캐릭터 비닐 커버를 팔았다.


정말로 농담이 아니고 우리 반에 비닐커버를 씌우지 않은 사람은 딱 두 명이었다. 하나는 선생님의 교사용 교과서, 다른 하나는 내 것이었다. 이유는 당연히 엄마의 반대였다. 우리 집 3남매 중에는 북커버를 씌운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언니는 북커버 없이도 너무 깨끗하게 교과서를 잘 들고 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나를 희망에서 한 발짝 멀어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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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블레이드, 유희왕 책비닐 ⓒ 박유정

 
난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말듣쓰, 읽기, 쓰기에는 세일러문, 수학에는 탑블레이드, 사회에는 햄토리 딱 이렇게 씌우려고 했는데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엄마는 다정하지만 주장을 할 때에 있어서는 완고한 사람이었고, 나는 예나 지금이나 감정에 호소하는 스타일이라 주로 내가 졌다. 하지만 나는 늘 일단 시도는 해보는 어린이였기 때문에 엄마의 거절 의사를 듣고도 다른 방법을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작전은 책 더럽게 쓰기. 말로 하기에도 민망한 작전이지만 내용은 며칠동안 가방에 유인물, 우산 등을 정리 없이 집어넣고 다녀 같이 다니는 책이 더러워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실패. 엄마의 "잘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가방을 보고 엄마는 충격을 받았단다"라는 걱정어린 편지를 받고 관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작된 두 번째 작전이 바로 책을 많이 읽는 것이었다.

사실 우리 집에는 이미 책을 종종 읽는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책을 많이 읽는다는 인상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진짜로 책을 '계속' 읽었다. 몇 주 동안 주말마다 도서관에 가서 책을 10권 빌려와 집에서도 보고 학교에서도 두세 권 가져가서 보고 계속 봤다. 그리곤 슬쩍 흘렸다.

"아, 책이랑 교과서랑 같이 넣으니까 교과서가 자꾸 구겨지네?"

그리곤 몰래 백 원짜리 햄토리 커버를 사서 한 권에 씌워 두었다. 결과는 성공. 엄마가 내 작전을 아시고 봐주셨는지 아니면 책 읽는 내 모습이 대견하셨는지는 몰라도 별 말없이 내 모든 교과서는 북커버를 입을 수 있었다. 달콤한 승리의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문탐(문구점에서 고전문구를 찾아다니는 것)을 다니면서 비닐 책커버를 재고로 만날 때마다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 들곤 한다. 나에게 달콤한 성취와 20여 년간 이어지는 책 읽는 습관을 가져다 준 고마운 북커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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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소재 북커버 외양 천소재 북커버 외양 ⓒ 박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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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소재 북커버 만드는 법 ⓒ 박유정

 
비닐 북커버들은 초등학생 교과서를 대상으로 만들어졌고, 교과서는 공부하기 쉽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크기가 크고, 또 시중에 나오는 도서들은 크기가 제각각이다. 그래서 아쉽지만 문탐으로 발견한 북커버를 실제 사용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주로 이면지나 안 쓰는 옷을 자른 천을 북커버 대용으로 사용한다. 너무 간단해 방법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냥 종이나 천을 책 높이 만큼 접어 책을 감싸고 옆으로 남는 부분은 책날개를 펼쳐 감싸고 다시 책날개를 접으면 어지간해서는 빠지지 않는 책커버 완성이다. 책을 보호하고 싶거나 책의 정보를 보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이따금씩 내가 가진 추억의 비닐커버에 딱 맞는 책이 나를 찾아올 때면 가슴이 설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북커버로 시작된 독서, 예기치 않게 찾아온 딱 맞는 책들이 나의 하루를, 그리고 삶을 감싸주는 행운이 되고 행복이 되었다. 또 그런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오늘도 책을 고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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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커버에 딱맞는 책들 ⓒ 박유정

#고전문구 #북커버 #세일러문 #추억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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