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유신준
즉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다시 걸었다. 안 받는다. 평소에는 전화를 잘 걸지 않는다. 바로 옆에서 전화를 해도 국제전화여서 돈이 많이 들어간다. 이쪽만 들어가면 그나마 괜찮은데 죄 없는 사부도 전화를 받으면 돈을 내야 한다. 그건 아무래도 서로 찜찜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전화를 잘 안 한다. 하지만 이건 비상사태다.
안 좋은 예감이 들어 빗속에 즉시 사부댁으로 갔다. 벨을 눌렀더니 사부가 나온다. 표정이 어둡다. 우산을 접고 들어가려 했더니 들어올 거 없단다. 니 짐을 다 싸놨으니 가지고 가란다. 이건 숫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죄송하다고 내가 뭘 잘못해서 그러시는지 말씀해주시면 고치겠다고 해도 그걸 니가 모르냐는 거다. 나도 화가 났다. 뭔가 오해가 있으면 말을 하고 소통을 해야지. 이쪽 사정은 묻지도 않고 그렇게 화부터 내시나? 묵묵히 짐을 챙겨 배낭에 넣었다.
그동안 수고했다는 사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지만 대꾸도 안 하고 돌아서 왔다. 장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비로소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영문도 모른 채 쫒겨나는 일도 있구나. 대망의 일본 정원사 수업이 이렇게 무참하게 막을 내리는 구나.
혼란에 빠졌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나. 라인 문자로 작업 지시를 했는데 내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면 왜 사정을 묻지 않았을까? 내가 사부를 괜찮은 분으로 보고 좋은 관계를 맺으며 성실하게 일해 왔는데 어느 부분이 문제가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일단 하루미씨에게 먼저 알려야 했다. 좋은 분을 소개해주셨는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화가 나신 것 같다고, 짐 싸가지고 쫓겨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세히 얘기해 보란다. 그동안 일들을 자세히 얘기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하루미씨가 진단을 내놨다. 사부가 뭘 시키든 묻기 전에는 의견을 얘기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사부에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소통을 한 것이지 구치고따에(말대답)을 한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사제 관계로 같은 배를 탔고 함께 좋은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서로 의견 교환하는 건 필수가 아니냐고.
그건 니 생각이고 그걸 사부가 오해했을 수도 있다고 한다. 사제지간이란 대화하는 관계가 아니란다. 지시하고 복종하는 관계란다. 사부가 어제는 왼쪽으로 가라하고 오늘은 오른쪽으로 가라해도 '예 알겠습니다' 하고 묵묵히 따르는게 제자의 도리란다.
이해가 안 된다. 사부와 나는 이미 한 팀이 된 건데 팀이 발전하기 위해서 의견을 말 못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게 무슨 말 대답이고 사부를 거스르는 일이냐고... 설령 그렇다 해도 설명을 하고 가르쳐 줘야지. 갑자기 이렇게 쫓아내는 법이 어딧냐고...
니 의견이 논리적으로 옳다해도 사부가 옛날 사람이면 그 사람에 맞춰 따라야 하는게 제자 위치란다. 하루미씨가 처음 춤 수업을 받을 때 별별 일을 다 겪었다며 제자 시절 경험담을 들려준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니 얼굴만 보면 혈압이 오른다는 춤 선생도 모셔봤다며.
실패 없는 삶은 없다
처음에는 씩씩거리며 들어왔는데 하루미씨 이야기를 듣는 동안 이상하게 설득이 됐다. 사부가 사는 쪽을 평생 바라보지도 않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사부가 뭔 말을 하든지 알겠다고 대답하겠다는 데까지 세뇌가 됐다(내가 이렇게 쉬운 인간이라는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사실 하루미씨 말 솜씨가 대단하다. 익히 알고 있다. 수십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수십년의 춤 인생을 지켜온 것도 설득력 있는 그녀의 언행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제자들 데리고 무용발표회 현장에서 대표인사 하는 것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 많은 관객 앞에서 원고도 없이 여유있게 꽤 긴 인사를 마쳤다. 나중에 내가 '총리가 국회연설하는 줄 알았다'고 놀리기까지 했었다.
하루미씨는 자기가 소개한 사람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잘못한 게 있으면 용서를 빌어야겠다며 사부를 찾아갔다. 한참 후에 돌아왔다. 많은 말이 오갔을 시간인데 말을 아낀다. 한 마디만 전하겠단다.
우리 선수가 뭘 잘못해서 레드카드를 받았는지 몰라도 다음 시합에 다시 뛸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했단다. 나는 절대 사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을 거라고, 이미 짐 싸가지고 대꾸도 안 하고 왔으니 이건 완전히 끝난 거라고 했다. 그녀는 일단 기다려 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