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준이와 예루.
송창권 제공
몇 년 후 아이들이 그에게 장애가 아닌 입양은 괜찮다는 신호를 줬을 때, 그는 사회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아이가 우리 가정에 왔으면 좋겠다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장애시설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형제로 자라야 할 아이들의 동의가 완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더 이상 일을 진척하는 건 어려웠다. 그는 계속 기다리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이유인지 모른다. 아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가족들이 매년 함께 다니던 소록도 봉사도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아들에게는 그 해가 마지막 소록도 행이었다.
대통령선거가 있어 그가 빠진 채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간 소록도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모른다. 혹은 어떤 동기가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장애입양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아들을 떠나 보내다
그러고 나서 그 일이 있었다. 아들에게 온 원인불명의 심정지. 공부도 잘했고 수영선수였을 만큼 운동도 소질이 많았던 아들이었다.
부모를 잃은 자식, 배우자를 잃은 이처럼 가족 내에 사별한 상대방에게 붙이는 호칭은 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는 마땅한 호칭조차 없다. 그만큼 자식을 잃은 고통과 슬픔의 크기와 깊이는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다.
헤아리기 어려운 심정을 묻어둔 채 그들은 아들이 어렵게 동의해 준 입양을 유언으로 받아들였고, 몇 달 뒤 입양을 진행했다. 다만, 남은 딸을 위해 장애입양이 아닌 보통 입양을 선택했다. 2013년 그 일이 있은 다음해 1월이었다.
넉 달이란 기간은 자식을 잃은 참척(慘慽)의 고통이 아직 뼛속까지 남아 있을 때였는지 입양 상담을 위해 찾아간 시설에서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와 아내는 예의 차릴 새도 없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아이들을 보는 순간 아들 생각이 나면서 미친 사람처럼 울게됐어요."
시기상조였다. 아직은 잃은 아들에 대한 슬픔을 더 깊이 받아들여야 할 때였다. 시설에서도 퇴짜를 맞은 건 당연했다. 1년 후 그와 아내는 제주가 아닌 육지에서의 입양을 다시 시작했다. 사전 상담을 통해 입양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했고 필요한 절차를 진행하면서 아이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