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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어 쓰는 회사... 대학생 인턴이 장점으로 꼽은 것

이성민의 <말 놓을 용기>를 읽고... 존댓말은 한쪽을 높이되 한쪽을 낮추는 차별적 어법

등록 2023.11.12 19:35수정 2023.11.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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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지난 9월 초, 딸이 IT 기업 대학생 인턴으로 들어갔다. 회사에 다녀온 첫날, 딸은 회사에서 '평어'를 쓴다며 난감해했다. 상사에게 이름을 부르고 반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가령, 철수 부장님이 인턴 아영에게 말한다. "아영, 점심 먹었어?" "응, 방금 먹고 왔어. 철수는 먹었어?"

딸은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놓으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회사에서 수평적 소통을 위해 직함 대신 영어식 이름을 부른다거나, 서로 존댓말을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왜 '평어'일까? 궁금했다.


존댓말의 폐해

최근 평어의 탄생과 실천, 그리고 평어가 가져다줄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 <말 놓을 용기>가 출간됐다. 저자는 바로 평어를 개발한 이성민 철학자다. 평어는 반말과 달리 우리 사회의 수직적인 관계와 문화를 바꾸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든 언어로, '이름 호칭+반말'로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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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놓을 용기 책 표지 말 놓을 용기 책표지 ⓒ 민음사

 
이름 호칭은 이름 뒤에 붙는 '아'나 '야'를 제거하고 이름만 부른다. 작가는 영어식 호칭에서 빌려왔지만, "~야", "~아"를 떼는 것만으로도 상하관계의 느낌이 없어진다고 말한다. 또한 언니, 형, 선배, 부장님 등의 사회적 관계의 호칭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 때 방해가 되고, 무엇보다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상대를 개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인식한다는 뜻(115쪽)이다.

두 번째 요소로 작가가 '반말'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의 수직적 문화에 언어가 작용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존댓말이다. 작가는 존댓말의 폐해를 지적하기 위해 한국학 연구자 최봉영의 '존비어체계' 개념을 가져온다.

존댓말은 단순히 한쪽을 높이는 그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쪽을 낮추는 차별적 어법이다. 놀랍게도 존댓말은 일본어와 한국어에만 있다. 중국어도 존댓말이 없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 두 나라에만 있다는 '야자타임'을 분석한 발췌도 흥미로웠다. 야자타임은 시간을 정해놓고 나이와 상관없이 말을 놓는 것인데, 존비어체계의 폐해를 극복해 보고자 일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인은 중대한 의사결정이나 강한 일체감이 필요할 때, 야자타임을 활용하여 조직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속내(本音 혼네)와 겉마음(建前 다테마에)을 쉽게 달리하는 일본은 '야자타임'을 거듭해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인은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야자타임이 끝나도 뒤끝이 남는다. 당연히 나이 어리거나 직급이 낮은 쪽은 말하기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된다.

존댓말은 '나이 따지는 문화'를 만들고 한국 사회의 위계적 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도 빨리 나이를 알아내 위아래를 정해야 마음이 편해진다.

책에 나오지 않지만, 나이 따질 때 화룡점정은 소위 '빠른'이 아닐까? 빠른 생일(연생)은 1월, 2월생이 학교 입학 때 동급생보다 세는 나이가 한 살 적은 것을 말한다. 나의 큰딸은 학교생활 내내 '빠른 생일' 때문에 어린애 취급당한다며 싫어했다.

재수하고 대학에 입학하자 너 때문에 관계가 복잡해졌다고 원망을 듣기도 했다. 해가 바뀐다고 한두 달 차이로도 위아래를 정하려는 문화에서 어떻게 유연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겠는가? 2003년부터 입학제도가 1월 1일부터 12월 31일로 바뀌었고 '만 나이' 시행으로 점점 사라지겠지만, 기성세대에서 쉽게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 역시 한두 살 나이 차로도 형, 아우를 따지는 기형적인 상하관계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친구나 동료' 그리고 '우정'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문화가 발달한 토대가 '또래문화'였다면서, 평어의 반말이 평등의 가치를 실현해 우리 사회에도 나이를 떠나 '또래문화'가 활발해지기를 희망했다.

평어의 더 경험하고 싶은 이유

회사 생활이 두 달이 지나, 평어에 어느 정도 적응됐다는 작은딸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런저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업무상 불필요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선배 혹은 나이가 많다고 눈치 보는 일이 없고, '죄송하지만…', '시간이 되시면, ~부탁해도 될까요?' 등 예의상 말을 길게 하지 않아도 된다.

"은지, 오후 4시까지 자료 부탁해."
"민수, 자료 잘 받았고 PPT는 내일까지 완성할게."


나도 30대~60대가 모여있는 책 모임에서 평어를 써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쉽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말끝에 '~요'가 자동으로 붙었다. 반말이라는 생각에 주로 나보다 어린 사람을 쳐다보며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보다 어린 이가 "윤정, ~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을 때,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모두가 친구이고 동료인 느낌을 받았다. 단 한 번이었지만 평어의 경험은 즐거웠다.

평어는 아직 결과를 알 수 없는 모험적 언어이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의 대학 수업, 회사, 유튜브 콘텐츠 등을 통해 평어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나 역시 평어의 모험을 계속 지켜보며 응원하고 싶다. 기회가 될 때마다 다양한 모임에서 평어를 실험해보고 싶다.

'추천의 글'에 실린 경희대 김진해 교수의 말처럼 "평어 쓰기가 단순히 관계를 말랑말랑하게 하고 분위기를 보드랍게 하는 놀이가 아니라 존비어체계의 균열을 가하려는 야심찬 기획이자 철학적 열망의 산물(182쪽)"이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평어 #말놓을용기 #이성민 #야자타임 #존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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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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