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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늘 어렵다, 하지만..." 독일 탈핵 장관의 한마디

[독일 생명평화기행 2] 위르겐 트리틴 전 환경부 장관과 만남

등록 2023.11.28 10:55수정 2023.11.2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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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7월 2일부터 14일까지 생명평화아시아와 녹색당이 공동주최한 ‘2023 독일 생명평화기행’에 참여했습니다. 베를린, 다하우, 뮌헨, 슈투트가르트, 프라이부르크 등 독일의 에너지 전환과 정치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나누겠습니다.[기자말]
"위르겐 트리틴?" 

독일 생명평화기행 팀의 일정표에 위르겐 트리틴 '전 장관'을 만나러 간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위르겐 트리틴에 관해서는 1998년 사회민주당(사민당)과 녹색당의 '적록연정'이 출범하자 환경부 장관으로 일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습니다. 전 장관이라고 하니 은퇴한 원로 정치인의 느낌이 물신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만남 장소가 의원회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녹색당이 원내정당(심지어 세 번째로 의원이 많은 정당)이고, 위르겐 트리틴이 당의 원로(?)이다 보니까 의원회관에 있는 녹색당 회의실을 잡아준 것인가 싶었습니다. 그런가 보다 하고 독일 의회 홈페이지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현역 의원 명단에 딱, 위르겐 트리틴이 있었습니다. 

"어, 뭐야? 이 사람… 아직 현역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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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트리틴 ⓒ Jurgen Trittin

 
탈핵 장관, 위르겐 트리틴

위르겐 트리틴은 급진적 학생운동을 거쳐, 좌파 생태주의를 표방하며 1980년 녹색당 창당에 합류했습니다. 1984년 녹색당 니더작센주 대변인으로 일했고, 1985년 니더작센주 의원이 되었습니다. 특히 1990년에는 니더작센주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적록연정을 구성하자 녹색당의 몫으로 연방 및 유럽부 장관이 되었는데요. 이때 니더작센주 총리가 게르하르트 슈뢰더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8년 뒤에 독일 연방 정부에서 총리와 장관으로 일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호흡을 맞추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녹색당의 연방 대변인(당 대표)으로 활동했고, 1998년 선거를 통해 연방 하원의원이 되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역사적인 적록연정을 출범시켰는데요. 세계 최초로 녹색당이 연방 정부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때 녹색당의 몫으로 요슈카 피셔가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 안드레아 피셔가 보건부 장관, 그리고 위르겐 트리틴이 환경부 장관이 되었습니다. 

환경부 장관으로서 위르겐 트리틴은 강력한 환경보호 정책을 비타협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 때문에 야당과 재계의 표적이 된 것은 물론이고 연합정부에서도 사퇴 압박을 받았습니다. 한편 녹색당 당원들로부터는 성과를 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직하게 버티고 나아간 결과, 2000년에 독일 정부와 핵발전소 사업자 사이에 핵발전소 폐쇄에 관한 합의를 끌어냈고, 2002년에 원자력법 개정을 통해 신규 핵발전소 건설 금지와 기존 핵발전소의 수명을 32년으로 제한하도록 했습니다. 정치의 본질인 합의와 제도화를 통해 완전 탈핵의 기초를 놓은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재생에너지법을 새로 만든 것, 에너지 소모가 심한 자기부상열차 계획을 무산시킨 것, 업계와의 '전쟁' 끝에 캔 보증금제를 도입한 것 또한 환경부 장관으로서 위르겐 트리틴이 거둔 성과였습니다. 특히 캔 보증금제가 실행되자 맥주의 나라인 독일에서 맥주 판매량이 감소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는데요. 지금은 독일 어디서나 '판트(Pfand)'라는 불리는 제도를 통해 캔, 유리병, 플라스틱병에 대한 수거와 환급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기다림 끝에, 변화

독일 녹색당의 '레전드'이자, 지금도 연방 하원의원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위르겐 트리틴을 만났습니다. 2m에 가까워 보이는 큰 키와 위풍당당한 풍채, 중저음의 목소리로 심드렁한 것 같으면서도 할 말을 다 하는 진솔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기다림 끝에 반드시 변화가 찾아온다면서, "콜의 16년, 무티의 16년을 기다렸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콜의 16년'은 기독교민주연합(기민당) 소속으로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독일의 총리였던 헬무트 콜(Helmut Kohl, 1930~2017)의 집권기를 말합니다. 헬무트 콜은 통일 총리로도 유명하죠. 하지만 독일의 최장수 총리가 될 것 같았던 콜의 시대는 1998년 선거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이 승리하고 적록연정을 출범시키면서 막을 내립니다.

위르겐 트리틴은 콜의 16년을 참고 기다린 끝에 찾아온 변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에너지 정치'를 꼽았습니다. 탈핵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재생에너지가 도입되었으며, 탄소배출에 가격을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무티의 16년'은 역시 기민당 소속으로 2005년부터 2021년까지 16년 동안 독일의 총리였던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1954~ )의 집권기를 말합니다. 독일어로 엄마라는 뜻의 '무티(Mutti)'는 메르켈의 리더십을 치켜세우는 별칭입니다. 하지만 무티의 시대도 메르켈이 스스로 더 이상 총리직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막을 내리죠.

무티의 16년 이후, 2021년에 사민당과 녹색당 그리고 자유민주당(자민당)까지 연합한 '신호등 연정'이 출범했습니다. 14.8% 득표율, 118석 획득이라는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내며 연정한 녹색당은 이전보다 훨씬 야심찬 기후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탈핵 정책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메르켈 정부 시절 2038년까지 탈석탄하겠다는 목표를 2030년까지 달성하겠다고 한 것이죠. 

하지만 독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에너지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런데 위르겐 트리틴은 오히려 기후 보호가 더욱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에너지 공급을 다원화 해서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산업계가 20%, 시민들이 10% 가량 에너지 절감에 성공하는 등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고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녹색당의 몫으로 연정의 부총리이자 경제기후보호장관을 맡은 로베르트 하벡(Robert Habeck, 1969~ )의 역할을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독일 기후보호법이 명시한 2045년까지 완전한 탄소배출 제로에 도달하려면, 2030년까지 70%까지 감축해야 하는데, 건물에너지법이 통과되면 80% 수준까지 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툭하고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저는 자신 있습니다!"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가의 언어

이 말을 듣는데 무슨 전율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사실 이전에 만난 독일의 정치재단들의 관계자들은 대부분 회의적이었거든요. 지금까지 독일이 모범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또 성과를 내고 있지만, 2045년까지 탄소배출 제로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두 세 배나 더 노력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회의적!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데이터와 팩트를 기반으로 해야 하는 연구자들의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위르겐 트리틴의 말은 달랐습니다. "자신 있습니다!"라는 그 말이 허세나 허풍 같지 않았습니다. 희망적! 그것은 불가능에 도전해 가능하게 만들자는, 비전을 제시하는 정치가의 언어였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불가능해 보이던 완전 탈핵을 가능하게 만든 위르겐 트리틴이었기에 더욱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위르겐 트리틴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정치는 늘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렵지 않다면 녹색당이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위르겐 트리틴의 말을 들으며 상상력이 발동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한국 녹색당도 세상을 뒤집을 정당 · 태양과 바람의 정당 · 체제를 넘어 문명의 전환을 이뤄내는 정당으로서, 머지 않아 탈핵과 탈석탄을 이루고, 평범한 사람들과 뭇 생명의 정치적 평등을 일궈낼 것과, 그 과정에서 저도 "자신 있습니다!"라고 외치게 될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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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트리틴 전 독환경부 장관과 만난 독일 생명평화기행팀 ⓒ 생명평화아시아

 
위르겐 트리틴과의 만남을 시작으로, 독일 녹색당 관계자들을 만나는 일정이 이어졌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독일 녹색당 주요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경제'를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독일 녹색당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계속>
#독일생명평화기행 #생명평화아시아 #녹색당 #위르겐트리틴 #탈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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