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장식명동 신세계 백화점 앞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져 길을 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김현진
어릴 적 하루는 엄마 아빠가 외출하신 날 언니와 동생들과 합심하여 창고에 있던 트리를 꺼내 장식한 적이 있다. 우리끼리 장식을 하고 작은 메모에 소원을 적어 매달았다.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모님은 그걸 보고 기뻐하셨고 어린 아이들의 행동이 기특했던지 다음 날 명동으로 데려가 선물을 사 주셨다.
북적거리는 시내로 나간 일이 처음이라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와 끝없이 흘러나오는 캐럴에 눈과 귀가 휘둥그레졌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발걸음은 이미 가벼웠는데 거리에 매달린 반짝이는 장식과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흥겨움에 젖어 내 심장은 평소보다 크고 빠르게 뛰었다.
길 모퉁이마다 빨간 냄비를 앞에 두고 빨간 겉옷을 걸친 구세군의 손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둠이 내리자 건물 벽과 나무 위를 뒤덮은 알전구에서 불빛이 흘러나왔다. 빨강, 노랑, 초록의 빛으로 뒤덮인 도시는 동화 속 세상 같았다. 성냥팔이 소녀의 마지막 성냥 불빛에 떠오른 환한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크리스마스란 세상을 신비롭고 아름답게 채색하는 놀라운 날이라는 생각이 어린 내게 스며들었다.
명동 성당에서 자정 미사까지 참여했던 그날, 미사의 대부분을 졸고 말았지만 하얀 미사포를 쓰고 두 손을 모은 채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평소 경험하지 못했던 숭고랄까, 고귀함, 인간의 아름다움 같은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장막 같은 게 드리워져 있어 대부분의 날에는 그 아래에서 일상의 나날이 흘러가지만 크리스마스 같은 날이면 막이 걷히고 감추어진 아름다움이 드러난다고. 평범한 세상과 사람들이 소중히 품고 있던 기쁘고 선한 마음이 온 세상을 뒤덮어 알전구처럼 반짝인다고.
그 뒤로 크리스마스는 더 각별한 날이 되었다. 해마다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seal)을 구입하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은 시작되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반복했던 일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추운 겨울 온기가 필요한 이를 배려하고 무언가를 나누는 것을 배웠던 게 아닌가 싶다.
차가운 날씨가 유독 더 아픈 사람들이 있고 그걸 보듬고 온기를 지펴주는 것이 함께 사는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걸. 구세군 냄비를 보면 성금을 내고 쌀을 모아 어딘가로 보내었던 겨울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겨울은 춥기에 따뜻한 것들이 더 따뜻하게 좋은 계절이 되었다.
크리스마스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은 단연 카드 만들기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방학식 즈음이면 친구들에게 줄 카드를 만드느라 바빴다. 고운 색지를 오려 그림을 그리고 정성스레 글을 적느라 때로는 밤이 늦도록 잠을 잘 수 없었는데 그걸 받고 활짝 웃을 친구들을 떠올리면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당시에도 산타의 존재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믿을 나이는 지났지만, 무언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희망만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주고받는 작은 카드, 그 안에 적힌 애정과 그리움의 말들로 일순간 마음이 환해지는 일이 내겐 기쁨이고 희망이었고.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이 세상과 삶은 누리고 싶은 즐거운 대상이 되었다. 돌아보니 사소한 행동으로 기분을 바꾸고 작은 노력으로 주변을 즐겁게 만드는 일이 우리가 삶에서 행하는 작은 기적이 아닐까 싶다. 기적이란 각자가 삶에서 짓는 기쁨으로 세상이 미세하게 따뜻해지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각자가 삶에서 짓는 기쁨의 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