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책 표지
한국소설가협회
신진 작가들이 포착한 한국의 단면
지난 몇 년 간 코로나19로 인한 비일상의 단절성이 신춘문예의 큰 흐름을 차지했다면, 2023년도 신춘문예는 다시금 회복된 일상의 주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해도 좋겠다. 다양한 소재의 글이 소설을 채우게 마련이지만, 2023년만의 특색 또한 없지 않다는 이야기다. 지난 십 수 년 간 여성과 소수자의 목소리가 두드러졌던 경향 또한 어느 정도 이어진 가운데 변화의 조짐이 발견됐다는 평도 있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로 유명한 정지아 작가는 <무등일보> 신춘문예 심사평에서 2023년 신춘응모의 특징을 두 가지로 압축해 드러낸다. 하나는 중장년 층의 응모가 늘고 과거의 현실을 그린 소설이 많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지난 몇 년간 압도적이었던 여성서사 대신 좀 더 보편적인 가족서사가 늘었다는 점'이다.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로 풀어가는 가족서사가 중심이긴 하지만, 그래도 보편의 공감을 살 수 있는 가족서사가 전보다 많아졌다는 뜻이겠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문학은 갈수록 좁아져왔다. 읽는 이가 줄어들고 쓰는 이 또한 마찬가지여서 소설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적잖았다. 특히 남성독자의 이탈은 심각한 수준이어서, 한국 소설이 이야기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여성향을 보인다는 점이 위기론에 힘을 실었다. 자연히 신춘문예 또한 여성서사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나 2023년 만큼은 그래도 소수나마 남성성이 녹아든 작품이 일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어느날 갑자기 사람이 코뿔소로 변했다고?
<광남일보> 당선작 '코뿔소' 같은 작품은 언급할 만하다. 임정인이 쓴 이 소설은 코로나19를 연상케 하는 가상의 질병을 배경으로 한다. 이 병에 감염되면 기침을 하다가 어느 순간 코뿔소로 변하고 만다.
주인공인 해음은 친구인 환이 어느날 코뿔소로 변한 뒤 사라졌다고 주장했지만 세상은 그의 말을 좀처럼 믿어주지 않았다. 21세기에 사람이 코뿔소로 변하다니 무슨 말이 되지 않는 소리냐고 일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코뿔소가 된 사람이 늘어나고, 그 가족들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니 나라 안은 코뿔소가 되는 병으로 떠들썩하게 된다.
소설은 코뿔소가 되는 사람들과 코뿔소가 다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난동을 부리는 코뿔소를 함부로 취급하는 사람들 등 다양한 군상을 등장시켜 오늘의 세상을 엿보게 한다. 비정상적인 상황과 마주하여 인간이 보이는 여러 모습은 코로나19 속에서 일어난 상황들을 연상케 하고, 그 속에서도 어떤 믿음이며 우정 같은 것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발버둥을 흥미롭게 그렸다.
지난 수 년 간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가 지배해온 신춘문예 가운데서 판타지적 설정의 전면적 수용, 거칠고 남성적인 묘사가 인상적인 작품이 수상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40억원 내걸고 후계자 모집하는 구두닦이
<전남매일신문> 당선작 '보스를 아십니까'도 빼놓을 수 없다. 후계자를 구하며 평생 모은 40억 원을 내건 구둣방 주인의 이야기다. 일생을 구둣방에서 구두를 닦으며 살아온 이가 이로부터 겪게 되는 일상의 변화를 흥미롭게 그렸다. 왜곡을 일삼는 언론의 모습이나 일확천금을 꿈꾸며 파리떼처럼 들끓는 사람들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그 결말부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읽는 내내 흥미롭고 읽고 나면 일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소설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낸다. 일상의 위로나 재발견 같은 소소한 문제 또한 의미가 있겠으나 근 몇 년 간 찾아보기 쉽지 않았던 선 굵은 이야기가 당선의 영예를 안았단 점이 흥미롭다.
2023년 신춘문예의 경향은 여전히 섬세한 시선으로 주변을 돌아보는 소소한 이야기에 무게추가 쏠려 있다. 그 섬세함이 어려운 국면을 헤쳐 나가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 편에선 위기에 봉착한 한국문학을 일점에서 돌파해나가며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작품 또한 발굴해내야 할 일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 그 방식과 캐릭터, 전개 모두에서 파격을 더하는 도전적인 작품을 어쩌면 올해 신춘문예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 문학에 관심이 큰 독자라면 신인 등용문을 두드리는 젊은 작가들의 현주소를 접해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일 테다. 한국만의 전통인 신춘문예에도 미덕이 있다면, 그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일 테니까.
2023 신춘문예 당선소설집
한소은, 이상희, 이혜정, 고은경, 신보라, 임정인, 백종익, 임순옥, 이강, 공현진, 정경용, 임재일, 나규리, 양수빈, 하가람, 이예린, 김하연, 김사사, 아신, 김만성, 박시안, 조제인, 배은정, 전지영, 김동승 (지은이),
한국소설가협회,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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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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