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생(李初生)의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인물카드의 이명(異名)란을 보면 이초생은 이재상(李載祥), 이동정(李同汀), 추전풍 (秋田豊)으로도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초생은 소화 14년(1939년) 12월 21일부터 소화 16년(1941년) 12월 21일까지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임재근
이재상으로도 불린 이초생은 1930년 상해로 건너간 후 1935년 12월에 문일민의 권유로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한 후 독립운동에 나섰습니다.
1938년에는 일본군에 밀려 중국 한구(漢口)에서 중경(重慶)으로 후퇴하는 도중, 사천성(四川省)에서 조선민족혁명당 당원 60여 명과 함께 3.1절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애국가를 불렀고, 도산 안창호 선생의 유지를 계승해 분투를 역설하는 등 독립정신 계몽에 적극적으로 앞장섰습니다.
그러다 그해 10월, 일본군 점령 아래 있는 남경(南京)에 침투해 공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이초생은 국내로 압송돼 1939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상록회는 강원도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며 1937년 3월에 조직한 항일 학생결사 조직이었습니다. 상록회의 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 주로 독서 활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상록회 회원들은 졸업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로운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춘천뿐 아니라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돼 무려 137명이나 연행됐고, 그중 1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1939년 12월 27일에 진행된 선고 재판에서 남궁태, 이찬우, 문세현, 용환각, 백흥기, 조규석, 배근석, 조흥환, 이연호, 신기철 10명은 징역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고, 전홍기, 차주환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습니다. 이중 백흥기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0년경 스무 살의 나이에 옥사했습니다.
조선총독부 판사, 민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