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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에서 시작된 나의 불안을 잠재운 것

만지고 쓰다듬는 동물과의 교감에서 받은 치유

등록 2023.12.18 15:08수정 2024.01.2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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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제주도에 사는 말 수의사입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게 된 이유를 글로 씁니다.[기자말]
유독 마음이 힘들어서 밤새 잠을 못 이룬 날이었다. 꾸역꾸역 아침 준비를 하고 통근버스를 탔다. 비가 내리고 있었고, 버스 안 내 자리의 차창 유리에도 빗가닥이 한 줄기씩 또로록 굴렀다. 빗가닥 여러 줄기가 차창에서 대각선으로 미끄러지며 세차게 이어졌다가 줄어들다가를 리드미컬하게 반복하고 있었다.

늘 그렇듯이 차 안은 조용했고, 나는 멍하니 빗물이 그리는 물줄기를 쳐다봤다. 주르륵 주르륵 물줄기 하나는 두 개랑 만나서 더 큰 물줄기가 되어서 유리창에 흘러내리기도 했고, 작은 물방울은 흐르지 않고 동글동글 맺혀서 창 밖의 모습을 볼 수 없게 창을 점령하고 있었다.


창에 새겨지는 물줄기를 멍하니 보다 보니 내 눈에 눈물이 자꾸 맺혔다. 그러다 볼을 타고 흐르기도 했다. 다른 사람에게 들킬세라 손으로 슬쩍슬쩍 닦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고 마음은 더욱 동요했다.  

내 마음속에 있던 뿌리 깊은 우울이 점령한 그런 날이었다. 오래 전부터 내가 무서워하던 과거의 한 장면이 어떤 트리거로 인해 건드려졌고, 그 여파로 내 마음에 큰 해일이 덮쳐서 힘들었던 며칠간이었다. 무리 속에서 왕따로 살았던 외로웠던 오래된 기억이 자꾸 튀어 올라왔다. 어디서부터 감정을 반응해야 할지 몰랐던 나의 무력함이 우울로 다가오던 그런 날이었다.

이런 종류의 우울한 기운은 어렸을 적에는 더 많았다. 그런데 그 상황을 되뇌어보면 희한하게 내가 쓰다듬던 우리 집 강아지 초롱이가 떠오른다. 목덜미의 곱슬한 털 감촉과 냄새가 함께.

부모님 사이에서 고성이 오갈 때, 나는 방에 혼자였고 초롱이는 내 허벅지 위에 조용히 앉았다. 나는 보드라운 초롱이의 등털을 끝도 없이 만지작 거리며 두려움을 삼켰다. 내가 초롱이를 만지면 초롱이가 편안해했고, 나 역시 강아지의 감촉과 온기로 공포를 버텼다.

어린 시절 얼음장 같은 집 안에서 나를 버티게 해주는 하나의 성냥불 같았던 초롱이의 보드라운 털 감촉이 지금도 아른하다.  


누가 누굴 치료한 걸까

통근버스는 일터에 도착했고 나는 사무실에 가서 책상 컴퓨터를 켰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과거의 기억 속에서 평점심을 찾지 못하며 마음이 메스꺼웠다. 목이 가라앉아 있어서 전화를 응대하기에 애매했고, 자꾸 눈물이 차올라서 이메일의 글이 잘 읽히지도 않았다.

일단 자리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오늘 오전 퇴원 예정인 망아지가 입원실 건물 밖 외부 울타리에서 어미 말과 함께 휴식하고 있는 중이었다. 때 마침 비도 그치고 햇볕이 잠시나마 나오고 있는 순간이었다. 초록색 풀을 먹고 노닐고 있는 망아지에게 나도 모르게 슬쩍 다가갔다. 일주일 전 처음 입원했을 때보다 훨씬 엉덩이도 커졌고 행동도 제법 날렵해졌다.

태어난 지 2개월 정도 된, 밝은 갈색의 망아지는 눈주위 털이 동그랗게 빠지는 성장 과정 중이어서, 하얀 안경을 쓴 것 같은 개구진 모습이었다. 외형처럼 성격도 역시 호기심이 많았다. 내가 슬쩍 다가가니 도망가지도 않고 한 번에 바로 나에게 접근한다. 나도 모르게 망아지에게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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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아지 보드라운 망아지의 털 ⓒ 김아람

 
만지고 싶었다. 망아지의 고슬고슬한 부드러운 갈기털을 만지고 싶었다. 망아지의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목근육을 쓰다듬고 싶었다. 망아지의 이마와 눈꺼풀을 살살 비벼주면서 시원하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에는 내가 억지로 붙잡으려고 하는 줄 알고 나를 경계하던 망아지가, 내가 슬슬 만져주고 긁어주며 시간을 벌다 보니 점점 경계를 풀었다.

점점 더 나에게 목을 내주고 머리를 내주고 갈기를 내주었다. 그 모습이 나를 어느 정도 허용한다는 말로 들렸다. 나를 허용한다는 그 느낌이 내 손을 통해 마음으로 느껴졌다. 그제야 난리를 치던 우울의 질주가 잠잠해지며 오늘 처음으로 내 입가에 미소가 올라왔다.

한참의 시간을 그렇게 머물렀다. 사진도 찍고 동영상도 찍어가며 나는 망아지를 만지고 관찰했다. 망아지 역시 나를 관찰하고 다가오다가 다시 풀을 뜯어 먹고 어미 말 옆으로 가기를 반복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망아지는 내가 눈과 귀 사이의 이마를 쓰다듬는 것이 좋았는지 그쪽을 자꾸 들이밀며 다가왔고, 나는 열심히 긁어주고 쓰다듬어 주었다.

비가 온 후의 햇살 속에서 젖은 풀을 부지런히 먹느라 바쁜 어미 말은 아무 표정 하나 없는데 내 눈에는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 내 마음이 차분해질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잉여로운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그 덕분에 드디어 나는 비밀스럽게 마음의 동요를 숨기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한참 놀다 보니 망아지의 퇴원 시간이 다가왔다. 퇴원 말과 망아지를 싣기 위한 말 수송차를 끌고 주인이 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인은 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고, 나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잘 치료해 줘서 감사하다고 주인은 말했는데 나는 겸연쩍었다.

망아지와 보냈던 조금 전의 둘만의 내밀한 시간들이 고마워서 나 역시 더 감사하다고 했다. 이쯤 되니 누가 누구를 치료해 준 건지 헷갈리기도 하다. 망아지와 어미 말이 말 수송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봤다. 그제야 마음속 끝도 없던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우리 곁에 공존하며 교감하는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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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음꼴 영혼 닮은꼴 영혼(Kindred Spirits), 엘런 쇼앤(Allen M.Schoen) 지음. ⓒ 김아람

 
사무실에 돌아와서 예전에 좋아했던 책을 아주 오랜만에 찾아서 꺼내 들었다. 앨런 쇼앤 (Allen M. Schoen)의 <닮은꼴 영혼>(Kindred spirits)라는 책이다. 대학 시절에 읽었으니 거의 20년 만이다.
 
특히 어린이 환자가 동물 친구의 존재에 민감하다. 그들은 어려울 때 사랑을 받는다는 느낌 외에, 자신의 감정을 어른보다는 동물 친구에게 쉽게 털어놓으며, 삶이 혼란스러울 때 동물을 돌보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도 있다. - 83p.
 
그 책에서 소개 되었던 동물 보조요법(Animal Assisted Therapy)이 참 인상 깊었는데, 나는 나도 모르게 동물에게 이미 치유를 받아왔고, 너무 많은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 왔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동물의 온기와 털의 감촉을 느끼면서 생기는 마음의 반응은 글로 표현하기 참 어렵다. 예전에 외국의 한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환자를 위해서 말(horse)을 병실로 데려오는 영상을 본 적이 있었다.

거대한 크기의 말이지만, 충분히 훈련되었고, 위생상의 문제가 없도록 모든 시스템이 구비되어 있었다. 집채만한 말은 병동의 복도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말은 병실 안으로 들어갔고, 병실에 누워있던 환자는 말의 깊은 눈을 한참 쳐다보면서 말을 만져주다가 눈물이 터지는 장면이었다.

커다란 말이 병실에 들어갈 수 있다니, 감히 상상도 못 할 외국에서나 가능한 극적인 장면이라 치부했다. 하지만 국내에서도 호스피스 병동에 말을 데리고 가서 아픈 분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홀스테라피(Hore Therapy)'가 도입되고 있다.

오늘 나 역시 나도 모르게 치료를 받았다. 그 천진난만한 하얀 안경을 쓴 망아지는 꽝꽝 채워진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서 질주하며 날뛰는 내 우울을 가만히 멈추게 해 줬다. 결국 나의 불안을 잠재운 건 철학자의 좋은 글귀도 아니었다. 타인을 붙들고 하소연으로 얻어내는 어색한 위로도 아니었다.

그저 보들보들한 촉감과 내 손을 더 원한다는 듯한 눈빛과 행동으로 내 심장 박동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이건 나만 느끼는 감정은 분명히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들의 반려동물로부터 많은 치유와 선물을 받아가며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만지고 싶은 날, 그러니깐 내 마음이 갈 곳 없던 그런 날, 나는 동물을 만지며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고, 그 순간 동물은 마치 내 뿌리 깊은 상처를 쓱 만져준 것 같았다.

이렇게 어린이에게도, 청년에게도, 주부에게도, 노인에게도 동물은 늘 항상 우리 곁에 공존하며 교감하는 존재일 것이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들과 무언가를 주고받으며 느끼는 유대를 이어갈 것이다. 이 닮은 꼴 영혼과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을지 더 배우고 알리는 것이 나의 작은 몫인 것만 같다.
#말 #치유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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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은 제주도에 사는 말수의사입니다. 사람보다 말을 더 사랑하는 이유를 글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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