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자책이 되지 않고, 아픈 몸에 일터가 맞춰질 수 있도록. 사진은 한울의 일기장
김한울
2018년 12월 9일의 일기다. 당시 나는 수면장애와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최근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라는 드라마를 봤다. 정신병동 간호사인 다은과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이다. 그중 다은의 우울증을 다룬 에피소드가 있었다. 다들 한 걸음씩 나아가는데 나만 그대로 머무는 느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우습게 느껴지는 상태에 대한 묘사가 너무 공감됐다. 우울증을 가진 다은이 복직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다뤄졌다. 일부 환자와 보호자들은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없다", "아픈 사람한테 내 가족을 맡길 수 없다"며 다은의 사직을 요구했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너무 아프게 느껴졌다. 이게 드라마 속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아팠다.
저 일기를 쓸 무렵 난 하루하루 제시간에 일어나 출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눈물이 나올 거 같거나 그냥 흘러내릴 거 같은 몸을 붙잡고 자리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업무 효율성 따위는 사치였다. 나도 알았다. 내가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제 몫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그러니깐 내가 문제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미안하고 더 움츠러들었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내가 무가치하게 느껴졌고, 나아가 이 상태가 영원히 계속될까 무서웠다.
노무사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적응장애, PTSD, 우울증 등을 가진 노동자들을 만난다. 직장 내 괴롭힘이나 성폭행, 불안정한 고용, 임금체불 등 다양한 이유로 그들은 질병을 얻었다. 그들이 원해서 질병을 얻은 것도 아니고, 그들이 잘못해서 질병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프다는 사실 자체로 자책하고, 나아가 이 질병이 낫지 않을까 봐, 다시는 건강했던(건강하다고 믿었던) 때로 돌아가지 못할까 봐 두려워한다.
아픈 몸에 맞출 수 있는 일터를
우리는 반드시 예전만큼 건강해져야 할까? 어떤 질병도 없는 건강한 몸만이 일할 자격이 있을까? 노동자 10명이 있다면 10개의 서로 다른 몸들이, 매일 다르게 일을 하고 있다. 타고난 몸이 다를 테고, 그들이 살아오면서 만들어 온 움직임의 경험들, 그것들이 남긴 흔적들이 모두 다를 테니 말이다. 같은 사람이라도 전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에 따라 매일의 컨디션이 달라지기도 한다. 우리는 단일한 몸을 가진 채 노동력을 제공하는 게 아니다. 같은 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좀 더 수월하고, 누군가에게는 죽을 만큼 힘들 수 있다. 어떤 날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어떤 날은 며칠이 지나도록 넘기지 못하고 앓을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자연히 늙고 병든다. 현재 아픈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거나, 아플 몸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도 회사는, 사회는 고강도의 노동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한 몸을 항상 지닐 것을 요구한다. 질병을 너무 쉽게 개인 탓으로 돌리고, '건강', '보편성'에서 어긋나있는 몸은 치료의 대상, 사라져야 하는 상태로만 여긴다. 이는 누군가의 일할 자격, 나아가 사회 구성원으로 존재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하는, 명백한 차별이다.
아픈 몸을 가진 사람도 일할 수 있다. 누군가는 주 5일, 8시간 노동을 할 수 있고, 누군가는 주 3일, 4시간의 노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쉬지 않고 1시간 동안 상담 전화를 받을 수 있고, 누군가는 30분에 한 번씩 바깥 공기를 쐬어야 할 뿐이다. 자주 쉬러 나가는 사람, 휴가를 자주 내는 사람이 문제인 게 아니다. 그게 문제가 되는 업무량과 자본주의가 문제이다. 아픈 몸이 회복되지 않아도 평등하고 온전한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 아픈 사람도 일할 수 있는 일터가 모두에게 좋은 일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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