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중에 뒤탈이 없다
유신준
할배사부의 일하는 스타일은 그의 평소 성격처럼 엄청 자유스럽다. 함께 일해보니 알겠다. 단언컨대 쿠마사부와는 절대로 함께 일할 수 없는 정반대 스타일이다. 작업하면서 그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 서로 다름이 확연히 눈에 띈다.
작업지로 떠나기 전 먼저 필요한 연장을 체크하면서 차에 싣는 절차를 거친다. 연장을 제대로 확실히 챙기지 않으면 낭패다. 연장이 하나라도 빠지면 일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날 일의 성패가 달려있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절차다.
체크를 잘하려면 연장들이 한눈에 보여야 한다. 이 경우 큼직한 플라스틱 연장함이 필수다. 평소 개별 연장들을 손질해 연장함에 잘 챙겨놓으면 떠날 때 연장함만 잘 챙기면 된다. 쿠마사부는 연장 정리의 달인이다. 항상 연장을 칼같이 정리해 놓는다.
할배사부는 그냥 툭툭 싣는다. 쿠마사부가 항상 케이스를 씌워놓으며 애지중지했던 전동 바리캉조차도 맨 연장으로 트럭 적재함에 툭 올려놓는다. 연장 잘 챙겨야지요 했더니 괜찮단다. 사부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아야 제자의 삶이 평화롭고 순조로운 법인데 나는 그게 전혀 괜찮지 않다. 큰일났다.
정원관리 작업에 또 하나의 필수품이 부직포 커버다. 나무를 손질하기 전에 넓은 부직포 커버를 바닥에 펴서 청소하기 쉽도록 해야하는데 커버 조차도 몇 장 없다. 커버가 부족하면 일의 효율성이 떨어진다. 정리할 때 작업 부산물들을 그냥 둘둘 말아 차에 실으면 끝나는데 청소하는 시간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이다.
쿠마사부라면 큰일 날 상황들이다. 신입 제자가 처음부터 시끄러울 수 없어 일단 조용히 내 할 일만 해 나갔다. 전 사부에게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신입은 일단 입을 다물었다. 할배사부가 내 말을 잘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엘레강테시마를 손질할 때 어떻게 작업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자세히 보면 전에 다듬었던 흔적이 남아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일단 물어보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사부가 시키는 대로 하면 나중에 뒤탈이 없다. 원추형 가리코미(토피어리)로 하란다. 쿠마사부가 비웃었던 방식이다. 일머리 모르는 것들은 이것도 가리코미를 하지. 이건 안에서 솎아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는 법인데 그것들이 알 턱 있나.
이건 일하는 스타일이 다른 게 아니다. 자기 일에 대한 관심 부족이다. 공부하지 않고 오랫동안 해오던 방식대로만 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취향상 가리코미를 하더라도 일단 가지를 솎아내고 나서 해야 한다. 쿠마사부와 일할 때는 숨막힐 것 같은 치밀함이 싫었는데 이번에는 할배사부의 자유로운 영혼이 마음에 걸린다.
엘레강테시마는 물 관리나 병충해 걱정도 필요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나무다.
생장도 빨라서 전정 후 금방 밀생할 정도로 기특한 놈이다. 다만 고온 다습한 환경을 극도로 싫어한다. 한여름에 통풍이 나쁘면 안에서 썩는 일까지 생긴다. 예방하려면 장마 전 밀생한 가지를 정리해줘야 한다. 쿠마사부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다.
실패한 관계의 상처는 진행형
난감하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모르는 척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할배사부 눈치를 봐가며 점진적으로 설득해서 개선해 나가야 할 문제다. 전정기법 이전의 사제간 기본적인 의사소통의 문제다. 일단 할배사부가 시키는 대로 원추형 가리코미로 다듬었다. 안을 헤집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가지가 밀집돼서 나무상태가 엉망이다. 제대로 관리하려면 손질 방식의 전환이 반드시 필요하다.
키 큰 챠보히바 작업은 괜찮았다. 쿠마사부도 둥근 가리코미로 다듬었으니까. 이견없다. 지붕보다 높이자란 챠보히바 작업은 트럭에 부착된 크레인을 이용했다. 할배는 아래서 크레인을 움직이고 내가 박스에 들어가서 작업했다. 큰 덩어리의 챠보히바 가리코미는 눈어림이 좋아야 한다. 부분 작업을 하면서도 전체를 염두에 두어야 원하는 모양이 제대로 나온다.
할배사부와 첫날 작업을 무사히 마쳤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연장정리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개선해야 할 것들이 많이 눈에 띄지만 극히 조심스럽게 진행해야 한다.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실패한 관계의 쓰라린 경험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마음속에 남아 있는데... 문제가 없는 곳이 어디 있으랴. 일단 나쁘지 않은 출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