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4 국민의힘 사무처당직자 시무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어느 시점부터 '국민' 대신 '동료 시민'이란 정치 용어를 즐겨 쓰고 있다. 시작은 지난해 12월 21일 법무부 장관 이임식 직후였다. 여당 비대위원장직 수락의 이유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는 "상식 있는 동료 시민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 길을 같이 만들고, 같이 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갑진년 새해를 맞아 현충원을 방문하여 방명록에 "동료 시민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고 적었고, 이어 국민의힘 신년 행사에서도 "100일 남은 국민의 선택을 앞두고 동료 시민에 대한 그런 계산 없는 선의를 정교한 정책으로 준비해서 실천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그가 내세우는 동료 시민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각에서 명확한 용어 정의가 쉽지 않은 '킬러 문항'이라는 지적이 나왔지만, 출제자인 한 위원장이 내뱉은 말에서 어렵지 않게 '정답'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지난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2024년 신년 인사회에서 "국민께서 우리의 마음을, 실천을 그리고, 상대 당과 차이를 정확하게 알아보실 것이라고 확신한다"면서,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낯선 사람들 사이의 동료 의식으로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동료 시민'이 아닌 자는 누구인가
그의 이런 설명에도 완곡어법 탓에 답이 분명치 않다면 누가 동료 시민이 아닌지 즉, '여집합'을 찾아내면 된다. 야당에서는 이미 답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지난 4일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은 "이재명 대표에 대한 테러는 증오 정치의 산물"이라며 "우리 사회에 혐오와 증오가 넘치게 된 건 윤석열 정부의 과도한 이념 정치와 편 가르기가 그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고 말했다.
김성주 수석부의장은 "한동훈 위원장은 동료 시민을 얘기하지만, 운동권은 척결 대상, 야당은 굴복 대상, 야당 지도자는 제거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 한, 한동훈 위원장은 슈트발 잘 받는 날씬한 윤석열에 불과할 것"이라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동료 시민의 여집합이 야당과 586 운동권 세력이라고 진단한 것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연설할 때 "My fellow citizens"(마이 펠로우 시티즌스)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제44대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2009년 1월 20일(미 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행한 취임 연설을 'My fellow citizens'로 시작했고, 제46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2020년 11월 8일(미 현지 시각) 당선인 수락 연설에서 'My fellow Americans'를 언급했다. 한국어로는 둘 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정도로 번역한다. 참고로, 바이든의 연설 첫머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번역은 필자).
"My fellow Americans, the people of this nation have spoken. They have delivered us a clear victory. A convincing victory. A victory for "We the People. (...) I pledge to be a president who seeks not to divide, but to unify. Who doesn't see red and blue states, but a United States."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 국민은 분명히 목소리를 냈습니다. 국민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국민'의 승리입니다. (...) 저는 분열이 아닌 통합의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약속드립니다. 빨간색 주, 파란색 주가 아닌 미합중국 전체를 바라보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을 비롯하여 시민 혁명을 경험한 서구 국가들은 '국민(people of the nation)' 대신 '동료 시민(fellow citizens)'이라고 주로 표현한다. '시민권'이 민주주의의 가치를 담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민 혁명을 겪지 않은 한국에서는 '시민'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았다. 그런데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동료 시민'이라는 정치 용어를 앞세우니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사실, '동료 시민'이란 명칭은 중고 브랜드다. 10년 전인 2014년 1월, 박상훈 당시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가 <경향신문>에 '국민보다 동료 시민'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한 적이 있다. 박 대표는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 국민교육헌장과 국민체조 등을 예로 들며,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평등이나 민주주의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통치자의 담론"이라고 역설했다.
오래전부터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국민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불평등 정치 용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다. 다만, 그 대안 명칭이 (박상훈 대표가 제안한) '동료 시민'은 아니었고, 민중이나 시민으로 통칭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왜 갑자기 '동료 시민'인가
그렇다면, 한동훈은 왜 비대위원장이 되고 나서 뜬금없이 '동료 시민'이라는 낯선 직역 용어를 앞세운 것일까? 민주당을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위한 선거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지만, 이 질문에 대해 보다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동료 시민의 여집합'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김기현 전 국민의힘 당 대표는 원내대표 시절인 지난 2021년 6월 17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대한민국이 586(50대·80년대 학번·60년대생) 운동권의 요새가 돼가고 있다"며 "한때 대한민국 체제를 뒤집으려고 했던 사람들이 그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며 이제 '꼰대·수구·기득권'이 돼 가장 많은 해악을 끼치고 있다"고 말했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은 김기현 전 당 대표의 인식을 계승하고 있다. 한 비대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6일 국민의힘 비대위원장 수락 연설에서, "이재명 대표의 민주당이 운동권 특권 세력과 개딸 전체주의 세력과 결탁해 자기가 살기 위해 나라를 망치는 것을 막아야 한다"며, "그런 당을 숙주 삼아 수십 년 간 386이 486, 586, 686이 되도록 썼던 영수증 또 내밀며 대대손손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르치려 드는 운동권 특권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고 거친 언사를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