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조문기의 묘 (애국지사 3묘역 705호)
임재근
"이 땅의 독립운동가에게는 세 가지 죄가 있다. 통일을 위해 목숨 걸지 못한 것이 첫 번째요.친일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이 두 번째요. 그런데도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 세 번째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705호 조문기 지사의 묘비에 쓰인 묘비명입니다.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었던 '부민관 폭파 의거'의 주인공 조문기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가로 살았습니다.
조문기 지사는 1926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안의 가세가 기울자 선생은 어머님을 따라 외갓집에서 유년기를 보내게 되는데요. 외조부 이조영은 고종 31년(1894)에 과거에 급제해 승지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조선이 강제로 병탄된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살고 있었는데요. 일제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해 분노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일장기 찢은 할아버지
어린 조문기는 학교에서 우민화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는 매일 조회시간에 일본 제국이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훈시했습니다. 신문과 라디오에서도 연일 일본의 승전 소식만 전했는데요. 조선의 어린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일본의 우수성을 들으며 세뇌당했습니다. 자라서 일본인처럼 되어야 하고 일본을 위해 전쟁에 자원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조문기 선생은 전쟁터로 가는 군인들을 실은 기차에 일장기를 흔들었고, 어느 날 하루 일장기를 들고 집에 돌아가게 됐습니다.
"문기야! 그 손에 든 게 뭐냐?"
"학교에서 나눠준 국기예요."
"이놈! 예가 어디라고 망측한 걸 집으로 들이는게냐!"
격노한 외할아버지는 일장기를 박박 찢어 버리고, 어린 조문기 선생에게 불호령을 내렸습니다. 항상 자상한 모습이었던 할아버지의 모습에 선생은 충격을 받았는데요. 그날 밤 할아버지는 조용히 선생을 불러내어 충격적인 이야기들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문기야. 이 할애비가 밉지? 네가 어려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아무래도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문기야, 이 할애비 말을 잘 듣거라. 네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다 거짓뿌렁이다. 왜놈들이 거짓으로 꾸민거야."
그날 밤 조문기 선생은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역사의 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을사늑약의 체결, 헤이그 밀사 파견, 고종의 강제 퇴위와 승하. 모든 이야기를 들은 조문기 선생은 손이 부들거리고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울분에 찬 조문기 선생의 가슴 속에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양지보통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향후 진로를 고민합니다. 경성사범학교 진학을 목표로 했지만 민족 차별로 인해 낙방하고 맙니다. 당시 학교의 정원 120명 중 50%는 무조건 일본인에게 배정되고, 나머지 50%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이 경쟁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에게는 공식적으로 25%의 기회를 준다고 했지만, 일제는 조선인에게 교육의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 순간 선생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때마침 선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의 거대 군수회사에서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광고였습니다. 기숙사를 무료로 제공하고, 월급도 주고, 회사 부설 학교에서 공부도 시켜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생은 적국에 가서 일본이라는 나라를 제대로 보고, 독립운동의 기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하는데요. 부모님과 상의도 하지 않고 그날로 즉시 기차에 올라 부산으로 내려갔고, 관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갔을 당시 선생의 나이는 16세였습니다.
1942년 10월, 선생은 도쿄 근처 일본강관주식회사에 훈련공으로 입소합니다. 그곳에서 파이프를 뽑아내는 일을 맡아서 하게 됩니다. 시뻘건 쇳덩이를 꺼내서 규격대로 잘라 넘기는 일이었는데요. 방열복과 장갑을 착용했지만, 엄청난 온도 때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작업이었습니다.
조선 청년의 파업
이곳에서 평생의 동지인 유만수 지사를 만나게 됩니다. 4살이 더 많았던 유 지사 역시 독립운동의 꿈을 가지고 이곳에 와 있었습니다. 서로의 뜻을 확인한 두 사람은 기회만을 엿보는데요. 마침내 1944년 5월에 사건이 터집니다.
회사에서 배포한 '훈련공 교양서'라는 책자가 사건의 발단이었는데요. 그 책에는 "훈련공들은 모두 농땡이를 잘 부린다. 밥만 많이 먹는다. 쌈질을 잘한다. 여자를 잘 후린다" 등 조선인 청년들을 모욕하는 차별적인 내용이 가득했습니다. 조문기·유만수 두 지사는 그 즉시 영향력 있는 조선인 청년들을 방으로 불러 투쟁을 기획하고 조직해 나갔습니다.
다음날 아침 3000여 명에 달하는 청년들이 식당에 모여, 출근을 거부하며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단 한 명의 이탈자도 없었습니다. 그동안 쌓여왔던 울분이 터져나왔습니다.
"훈련공 교양서의 저자를 당장 우리 앞에 데려와라!"
"사장은 직접 나와서 사과하고 교양서의 판매금지와 판매된 책들을 전량 회수하라!"
"유사사태의 재발방지를 책임지고 보장하라!"
"훈련공들의 대우를 개선하라!"
"조선인 차별을 철폐하라!"
이 사건은 전쟁 중에 군수공장에서 일어난 유일한 파업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인들의 파업이었기 때문에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두 지사는 일본 전역에 지명수배가 내려지게 됩니다. 두 사람은 이곳 저곳 노동판을 떠돌며 도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일본에 온 지 2년여의 세월이 지난 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데요.
"우선 조선으로 돌아가자. 가서 큼직한 일 몇 가지를 벌이고 준비되는 대로 중국으로 가자."
"큼직한 일이라면?"
"조선에 가서 꼭 해야 할 일이 있어. 민족을 배반한 친일거두와 침략 원흉을 처단해서 우리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일이야."
'정치깡패 친일파' 박춘금 처단 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