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의 어록을 통해 이순신의 정신을 재조명하다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자세를 강조

등록 2024.02.14 14:26수정 2024.02.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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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이 현충사관리소에 소장 중인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에서 새로 찾았다고 발표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일부.
문화재청이 현충사관리소에 소장 중인 충무공유사(忠武公遺事)에서 새로 찾았다고 발표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중 일부. 연합뉴스
 
이순신의 백전백승의 전략과 전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바로 유학(儒學)을 기반으로 한 인격수양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해 이순신은 항상 독서를 했고 거기서 얻은 어록을 <난중일기>에 적었다. 택당 이식(李植)은 <시장(諡狀)>에서 "이순신은 독서를 통해 큰 뜻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중국 촉한의 정치가 제갈량이 "지혜로운 자는 옛 것을 스승으로 삼는다[智者師古]"고 했듯이 이순신은 자신에게 도움되는 어록을 별도로 기록하여 좌우명으로 삼은 것이다.

<난중일기>를 보면, 일기 이외에 교훈이 되는 한시와 어록, 자작한 한시와 산문 등 별도로 적은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이순신이 평소 가졌던 생각과 다짐을 살펴볼 수가 있다. 특히 이순신이 중국고전에서 인용한 어록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교훈이 되어 준다. 그 내용들은 정확한 이해를 위해 저자와 출전을 밝히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러함에도 이것이 최근에 와서야 고증이 이루어졌는데, 그만큼 옛 고전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이순신이 어록을 집중적으로 적은 시기는 계사년 1593년부터다. 이해 3월 이후 명나라 장수 심유경(沈惟敬)이 일본과 강화 협상을 시작하고, 그후 조선군이 남하한 일본군에 대한 토벌작전을 벌이지만, 명나라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다. 6월에는 일본군이 웅천·제포·안골포 등지에 주둔하고 서방의 진입을 준비하자, 이순신은 해상의 요충인 견내량과 한산도 바다를 중심으로 봉쇄 작전을 세운다. 8월에는 통제영이 설치되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삼도수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후 이순신은 계사년 9월 15일자 이후에 <난중일기>에 일기 외에 별도로 어록들을 기록했는데, 그 중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두 글귀가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홍기문과 이은상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이 글의 출전에 대한 고증은 최근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① "출전하여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 살려는 계책을 돌아보지 않으니 분한 마음이 그지없다.[出萬死不顧一生之計 憤憤不已]"

②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일에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를 따르리라[安國家定社稷 盡忠竭力 死生以之]
- <신완역 난중일기 교주본> (노승석 역주)

위 글에는 위기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만회하기 위해 전쟁하는 데는 자신의 죽음을 초개와 같이 여기며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의지가 담겨 있다. ①번은 유성룡의 <서애집> 〈정충록발(精忠錄跋)〉에서 확인되므로, 이의 저자는 유성룡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출만사불고일생지계(出萬死不顧一生之計)"구는 이미 2천 년 전부터 중국의 고전에서 관용적인 용어로 사용된 것이 확인되었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장이진여열전(張耳陳餘列傳)〉에 보면, "장군이 눈을 부릅뜨고 큰소리치며 출전하여 만 번 죽을지라도 한 번 살려는 계책을 돌아보지 않고 천하를 위해 잔악한 적을 제거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유성룡이 이 글귀를 인용하면서 뒤에 "분분불이(憤憤不已)"를 붙인 것이다.

②번은 비슷한 문장이 실록 등에 나오지만,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 <통감절요> 〈후한기〉의 희평(熹平) 원년조에 나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송나라의 묵재(黙齋) 채정손(蔡正孫)이 말하기를, "대신이 나라의 주석(柱石)이 되어 천하가 위기에 처하면 마땅히 국가를 편안히 하고 사직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서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에 따르는 것이 옳다.(當以安國家定社稷 爲己任 盡忠竭力 死生以之可也)"고 하였다.

<춘추좌씨전>의 소공 원년조에도 "자산(子產)이 말하기를, 진실로 사직에 이로우면 죽으나 사나 이에 따르리라(苟利社稷 死生以之)"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사생이지(死生以之)"는 "죽든지 살든지 간에 그것을 따른다"는 복종의 뜻으로 풀이된다.


위의 두 어록에 대해 그 당시 전쟁 상황으로 살펴보면, 이순신이 계사년에 견내량의 해상 봉쇄 작전을 세우고 호남으로 수륙 진격하려는 일본군을 방어하는 전쟁에서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자세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을 다짐하며 적은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이순신이 국난극복에 대한 자신의 강한 염원을 대변해줄 수 있는 고전의 글귀로 채택하여 별도로 기록한 것인 만큼 의미가 매우 간절하고 심장하다. 위의 글은 친필 원본 <난중일기> 초고본에 적혀 있어 일부 번역한 난중일기 초역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난중일기>는 물론 전형적인 일기체 형식을 갖추고 이순신의 활약상과 그 당시의 전황이 상세히 적혀 있어 전쟁문학의 백미로 손꼽는다. 이 사실에 더해 그 안에 들어 있는 이순신의 개인적인 심정이 담긴 별도의 어록도 인간 이순신을 조명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특히 "충성과 힘을 다하여 죽으나 사나 이를 따르리라[盡忠竭力 死生以之]"는 글귀는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일이라면 어떤 상황이든 죽고 삶에 얽매이지 않고 대의를 실천하겠다는 단호한 의지가 담긴 점에서 개인주의가 팽배한 현대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노승석 #이순신 #난중일기 #어록 #견위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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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학자. 문화재전적 전문가. 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자문위원(난중일기). 현재 동국대 여해연구소 학술위원장. 문화재청 현충사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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