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탠츠의 바다한 사람이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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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시작 몇 회는 그저 그냥 보았다. 그러다 자각하기 시작했다. 보고 싶은 것들은 너무 많은데, 나에게는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다는 사실을 말이다.
결국 빨라진 시청 속도
퇴근 후 집에 도착하자마자 드라마를 보기 시작해도 5시간 가량이 고작이었다. 일주일 후면 아이는 온다. 평일 기준 주 5일 30시간이 내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시간이었다.
반면에 시청을 시작한 <스위트홈>만 해도 시즌이 2개에 각 러닝타임이 497분(약 8시간), 568분(약 9시간)이었으니 주야장천 드라마만 보아도 드라마 한 편을 끝내기가 꽤나 오래 걸릴 것이 자명하다. 드라마 정주행이 끝나면 유혹적인 비슷한 콘텐츠들이 굴비 두름처럼 엮어져 튀어나오는 것도 한몫했다.
"아니 <스위트 홈> 끝나면 <경성 크리처>도 봐야 하고, <기묘한 이야기>도 못 본 시즌이 쌓여있는데, 일주일 동안 도저히 다 볼 수가 없잖아."
"최소 시간에 최대 시청"으로 시청 전략을 바꾸고는 배속 버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1.25배. 1.25배는 사실 1배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래 1.5배의 속도로 보자," 하면서 시청 속도를 올렸다.
479분(약 8시간) 짜리 콘텐츠를 1.5배로 보면 382분(약 6시간)이 걸린다. 그 절약한 두 시간으로 다른 드라마를 더 보는 것이 이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대단한 착각이었음을 금세 깨닫게 되었다.
나는 근 일주일을 회사 가기와 드라마 보기 이외는 아무것도 못한 폐인이 되었다. 집안은 엉망진창이고 대충 챙겨 먹어 속은 더부룩하고 다크서클은 턱 밑까지 내려올 지경이었다, 멍하니 공원 길을 걷다가 튀어나온 고양이에 좀비가 튀어나온 듯 놀라기도 했다.
과연 본 것이 맞을까?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드라마에 대한 화제로 이야기를 하는데, 분명히 내가 봤던 드라마에 꽤나 비중 있게 나왔던 등장인물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놀랍게도 캐릭터의 이름과 그 장면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장면이 있었어요?"
동료의 디테일한 설명에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 그 사람. 기억나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드라마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작은 화면으로 배속을 하며 보느라 놓쳤던 디테일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말이다. 보는 양적인 면에 집착하며 보다 보니 정작 중요한 포인트들을 많이 놓치고 있었다.
문득 옛날이 떠올랐다. 정주행이 웬 말이람. 일주일에 한두 번 방영 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본방사수를 하며 그 다음 주를 기다리며 드라마를 보았던 때를 말이다. 작은 화면이었지만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나쁜 캐릭터를 욕하기도 하고, 착한 주인공의 불행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던 순간들 말이다.
일주일 동안 그 드라마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던 그때 보았던 드라마들 중에서는 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기억나는 장면들이 있다. 며칠 전 보았던 드라마의 장면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빨리 보느라 놓친 것을 생각하게 된다. 결국 시간을 아낀 것도 아니고 드라마를 제대로 본 것도 아니고, 별 흔적도 없이 내 시간만 잡아먹은 셈은 아닐까? 아직도 내가 구독하고 있는 OTT에는 평생이 걸려도 다 못 볼 만큼 많은 콘텐츠가 쌓여 있다.
내 시간을 지켜야 한다. 드라마 뿐만 아니라 다른 일상도 소중하므로. 보지 못해서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아무리 빨리 보아도 나는 다 볼 수가 없다는 한계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이제부터는 정주행을 너무 좋아하지 말아야겠다.
느리게 내린 드립 커피의 맛이 더 다양한 것처럼, 느리게 보면서 드라마의 다른 맛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글쓰기 모임에서 만나 시민기자가 된 그룹. 70년대생 동년배들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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