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탕 먹는 날은 행복한 날 삼남매는 이날 '맛있다'를 연발하면서 마라탕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4인 마라탕의 가격은 60,200원이었다
이지아
아이가 먹고 싶은 것은 딱 그! 마라탕이었다. 마라탕 비스무리하게 끓여낸 엄마표 마라탕은 '그' 마라탕에 대한 욕구만 더 가중시킬 뿐이었다. 며칠 후, 어쩔 수 없이 '그 마라탕' 집에 왔다. 그렇게나 좋을까. 커다란 대접에 한가득 마라탕이 나오자 오동통한 두 볼이 위로 쑥 올라간다. 잘 사용하지 못하는 왼손까지 써가면서 옥수수면, 숙주 한 가닥까지 야무지게 먹는다. 이렇게 좋아하니, 자꾸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아이들이 자주 가는 큰 소아과 1층에는 솜사탕 가게가 있다. 참으로 탁월한 입지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은 솜사탕을 좋아하고, 부모는 아픈 아이에게 관대하니까. 이제 중학교에 올라가는 둘째와 오랜만에 소아과에 갔다 나오는 길이었다. 아이가 문을 나서며 심드렁하게 말한다.
"솜사탕이 안 먹고 싶어질 줄 알았으면 먹고 싶을 때 많이 먹을 걸 그랬어요."
아이의 말에 깜짝 놀라 아이를 쳐다봤다. 심드렁한 말투와 달리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다. 아이의 말에, 아이의 눈물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 작은 가슴에 솜사탕에 대한 한이라도 맺힌 걸까.
나는 솜사탕에 유독 인색했다. 설탕 덩어리를 먹는 것도 싫었고, 솜사탕 때문에 끈적거리는 손이며 입과 볼을 닦아주는 일이 번거로웠다. 도대체 저게 뭐가 그리 먹고 싶다고 성화인지, 나들이라도 가는 날에는 솜사탕을 사달라고 할 때마다 아이에게 타박을 했다. 잊었던 것이다. 나도 한때 솜사탕을 좋아하는 어린 아이였다는 것을.
아이는 자란다. 육아가 힘든 이유는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될 거 같은 착각 때문이다. 솜사탕을 보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아이는 이제 솜사탕 가게를 의젓하게 지나갈 줄 알며 마음껏 못 먹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할 만큼이 되었다. 아이의 후회는 나의 후회로 남았다.
'어차피 싫어하게 될 줄 알았다면 좋아할 때 실컷 먹게 해줄 걸.'
실컷, 마음껏 해봐야 그나마 아쉬움이 덜 남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술을 좋아하고 술중에 소주가 최고라 여겼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이 소주가 싫어졌다. 한때는 그리 달다고 느꼈던 소주인데 그 쓴 맛에 놀라 차마 입 안에서 넘기질 못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고 나니 온몸이 진저리치듯 떨린다. 그 후로는 소주 병만 봐도 어우,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영화 <친구> 중 대사) 실컷 먹었다 생각했다. '이제 그만 먹어야지' 다짐도 많이 했다. 아무리 결심해도 소용없던 일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찾아온 순간, 아쉬웠다. 소주와 함께 했던 내 청춘이 시들어버린 것 같아 서글프기도 했다. 이제 건강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으니 다행이다 싶다가도 여전히 그립다.
마라탕에 조금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적어도 마라탕 하나쯤은 원없이 실컷 먹게 해줘도 되겠다 싶었다. 그러면 또 금세 질려버리는 의외의 소득을 거둘지도 모를 일이다.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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