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선택의 재검토책 표지
김영사
2차대전 미국 최대 프로젝트의 결과
미국 유명 저술가 말콤 글래드웰의 <어떤 선택의 재검토>는 폭격의 역사를 다룬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이가 폭격으로 사망한 2차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막 창설된 미 공군이 전쟁에 본격 참전하며 벌어진 고민과 선택, 그 결과들을 돌아본 책이다. 2차대전에 대하여 알고 있다 믿는 이가 적지 않겠지만, 이 책이 다루는 바는 아마도 그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질 만큼 낯설고 새롭다.
책의 원제는 <Bomber Mafia>, 직역하면 '폭격기 마피아'가 되겠다. 폭격기와 그를 둘러싼 일종의 세력집단의 이야기란 점에서 붙은 이름이다. 그 세력이란 초창기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들이다. 폭격을 둘러싸고 저들의 이념과 목표를 관철시키고자 했던 이 집단이 마침내 이룬 것과 이루지 못한 것을 이 책이 차근히 돌아본다.
책은 우선 2차대전 시기 미국이 진행한 군사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은 비용이 든 사업에 주목한다. 흔히 원자폭탄 개발, 즉 맨해튼 프로젝트가 가장 많은 비용이 든 사업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이가 많을 테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슈퍼포트리스 프로젝트, 즉 B-29 폭격기 개발사업이 미군이 가장 공을 들인 사업이었다.
당시 연합군은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나치와 이탈리아가 패망했으나 일본이 항복하지 않는 탓에 전쟁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전쟁이 계속되니 전선이 유지돼야 했고, 그를 뒷받침하기 위한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들어갔다.
연합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일본 본토 상륙까지 진지하게 검토했다. 그러나 상륙에 따를 엄청난 피해, 즉 자국 청년들의 죽음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이의 죽음은 그 자체로 고통일 뿐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의 정치판에도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출격할 일 없는 조종사들의 중요했던 시간
그 결과 미군은 항복을 하지 않는 적국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힐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다름 아닌 폭격이었다. 때마침 개발된 B-29는 태평양 전선에서 확보한 공군기지로부터 폭탄을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 후 돌아오는 것을 가능케 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인 탓에 공군력이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졌던 미국 공군이 세계사에 처음 등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책이 주목하는 건 바로 이 순간부터다. 공군이 창설됐으나 기술력의 한계로 어떤 전선에도 닿을 수 없었던 수년 동안 초창기 전투기 조종사들은 한적한 기지에서 하릴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미래를 대비해 창설됐을 뿐 실제 전투에 투입되리란 기대 또한 없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책은 연구와 토론이라고 말한다. 기존 전사에 있었던 수많은 작전에 대한 공부가 잇따랐다. 공부는 그저 전쟁수행의 방법론에 그치지 않았다. 3700만 명이 죽거나 다친 유례없는 참극, 즉 1차대전의 역사와 그 불필요한 희생의 의미에 대한 고민들이 이어졌다. 이를테면 전략적 의미가 거의 없는 솜 전투와 같은 격전에서 양군 합쳐 무려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온 비극 같은 것이 과연 필요했느냐에 대한 검토가 이뤄진 것이다.
그로부터 책은 미 공군 초기 역사를 대표하는 두 명의 지휘관, 커티스 르메이와 헤이우드 헨셀을 대조하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가히 악연이라 불러도 좋을 두 지휘관은 치열하게 맞붙던 당대 공군의 두 가지 철학을 대표한다. 하나는 주어진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는 것이야말로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는 방법이란 전통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덜 죽이면서도 같거나 더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작전수행의 방식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이었다.
야간무차별폭격에서 주간정밀폭격까지
2차대전 당시 폭격이란 이랬다. 폭격기가 출격하여 상대방 영토 상공에 진입한 뒤 싣고 있던 폭탄을 죄다 떨어뜨리고 돌아오는 일이다. 타깃은 광범위했고 구체적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오늘날 군수업체는 9킬로미터 상공에서 피클통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홍보하지만, 당대의 기술은 그를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체 위에서 조약돌처럼 보이는 저 아래 건물을 조준해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눈대중으로라도 무엇을 조준하려 속도를 늦추거나 고도를 낮춘다면 당장 격추당할 위협이 커졌다. 조종사를 양성하는 비용을 고려하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리하여 폭격은 늘 야간에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이것이 2차대전 당시 폭격을 다룬 영화에서 공습경보가 야간에 울리는 이유이고, 성당과 학교 같은 비전투시설이 폭격에 맞아 파괴된 이유이고, 수많은 민간인이 죽어나가야 했던 이유다. 민간인이 폭격으로 희생된다는 비판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적국의 민간인조차 적이라는 인식이 양국에 팽배했던 탓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야간 고고도 무차별폭격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영국 공군은 야간에 출격하여 독일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함으로써 적의 사기가 저하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믿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었지만 완전한 파괴는 곧 아군의 승리에 다가서는 길이라고 믿었다. 처칠의 측근이자 참모였던 프레더릭 린더만 같은 이는 '독일 노동자 계급 절반을 파괴하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이론을 신봉했고, 그 영향 아래 임명된 폭격사령부 지휘관 아서 해리스는 "군수품 생산에 참여한 사람도 현역 군인"이라는 희대의 망발을 내뱉었다. 폭격기가 저 아래 군사시설과 민간시설, 군인과 민간인을 구분하지 않는 저변에는 런던의 지휘관의 이 같은 인식이 자리했다.
책은 미국 공군 관계자가 사상 처음으로 '주간 저고도 정밀폭격'을 시도하자며 영국 처칠 수상을 설득하는 과정, 어렵게 독일의 볼베어링 공장을 주간 폭격하는 작전을 따내게 된 이야기, 그럼에도 그를 실패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흥미롭게 다룬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군수시설을 정밀 폭격하는 게 가능하다면 민간인 수천을 죽이는 것보다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 그를 뒷받침했다.
저를 희생하며 세상을 나아지게 만든 이들
그러나 작전은 기존 방식보다 훨씬 큰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폭격기를 기다리는 적의 방공망과 전투기 편대를 뚫고서 주간에 저공 저속비행을 감행하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적국 민간인을 덜 죽이기 위해 아군 동료들의 위험을 키우는 일은 즉각적인 반대와 맞부딪칠 위험이 있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미 공군 장성들을 비롯한 군사전문가를 두루 인터뷰하고 공군 도서관을 수시로 찾아 자료를 수집하면서 폭격기 마피아로 불린 일단의 집단이 어떻게 폭격의 개념을 바꾸어나갔는지를 서술한다. 오늘날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이 제노바 협약에 따라 금지되기까지 군부 내에서 기존의 통념에 저항한 이들이 있었음을 이 책이 일깨운다.
통념에 반대하고 스스로와 동료들의 편익에 반하면서까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노력은 수시로 어려움과 봉착한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눈앞의 개인적 이익보다 뜻을 앞세우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의 신분으로도 말이다.
책은 그저 수십 년 전 끝난 전쟁사에 그치지 않는다. 가치와 이해가 갈리는 선택의 순간 앞에 수시로 놓이는 인간에게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일깨우고, 설사 그 결과가 마음처럼 나오지 않더라도 기꺼이 그를 감당하는 것의 가치를 알게 한다.
헨셀과 르메이는 유럽에서의 폭격만 수행하지 않았다. 이들은 항복을 않는 일본 본토 전역에 소이탄을 떨어뜨리는 작전을 맡아 수행해야 했고, 그때도 서로 다른 판단 아래 대비되는 결정을 내린다. 2차대전 뒤 2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도, 또 걸프전과 이라크 전쟁, 러우전쟁과 이스라엘 대 팔레스타인 전쟁 등에서도 민간인 피해며 금지무기 사용과 관련한 논란이 어김없이 터져 나온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책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법한 국제문제 가운데서도 언제나 더 나은 판단이 자리할 여지가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는 점일 테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 - 최상을 꿈꾸던 일은 어떻게 최악이 되었는가
말콤 글래드웰 (지은이), 이영래 (옮긴이),
김영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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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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