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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 사진 미리 준비하지 마시라

"죽을 날 받아 놓고 왔다"는 이웃 할머니 말씀에 헛헛해진 마음

등록 2024.03.05 21:13수정 2024.03.05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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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부려놓은 4톤의 통나무, 화목난로 크기에 맞춰 엔집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개야 비로소 장작이 된다. ⓒ 조명신


삼일절 연휴였던 지난 주말, 벼르던 장작 패기에 나섰다. 화목난로가 유일한 난방 수단인 시골집이라 따뜻한 겨울을 보내려면 장작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해가 바뀌면 봄이 오기 전에 하는 연례 행사다. 귀촌 11년 차에 접어들었으니 그 햇수만큼이나 이젠 익숙해진 일이기도 하다. 


올해는 마을 어귀 산에 간벌하는 곳이 있어 수월하게 참나무를 구할 수 있었다. 나뭇값도 물가의 영향을 받는 터라 해마다 조금씩 오른다. 벌목 업자와 약간의 협상을 통해 올해는 톤당 11만 원에 샀다. 그렇게 구한 4톤의 통나무를 마당에 부려놓고 시간이 나기만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거대한 통나무를 화목난로에 넣기 위해서는 고단한 작업이 필요하다. 난로 크기에 맞춰 통나무를 엔진톱으로 자르고 도끼로 쪼개야 비로소 장작이 된다. 재단한 장작은 비를 피하도록 처마 아래 차곡차곡 쌓아둔다. 다시 겨울이 돌아올 때까지 볕과 바람의 도움으로 서서히 마를 것이다. 이렇듯 시골의 월동 준비는 한 해를 앞서간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무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에 크기와 무게가 제각각이다. 가급적 허벅지 굵기의 나무를 요청했으나 올해엔 직경이 50센티미터쯤 되는 통나무도 적지 않게 섞여 있다. 이런 나무는 혼자 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움직이는 것도 쉽지 않다. 하루 작업을 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고 손이 떨리는 이유다.

마을 할머니의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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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부터 작업하던 엔진톱을 잠시 멈추고 귀마개를 내려놓았다. ⓒ 조명신


공휴일이던 삼일절에 이른 아침부터 작업복을 입고 마당에 나섰다. 기온이 갑자기 떨어져 싸늘한 날씨였지만 작업을 하다 보면 몸이 금방 데워진다. 엔진톱 굉음 탓에 귀마개를 하고 뿜어져 나오는 나뭇가루를 막기 위해 마스크까지 썼더니 마을 할머니께서 마당에 들어선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부랴부랴 엔진톱을 끄고 인사를 드리니 말없이 비닐봉지를 내미신다. 할머니는 지난해 할아버지가 먼저 떠나신 후 홀로 지내신다. 점점 거동이 불편해지시는 듯해 가끔 이런저런 일을 도와드리곤 했다. 그래봐야 불이 켜지지 않는 가스레인지를 손본다거나 간혹 장을 봐 드리는 사소한 일들이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수확한 농작물을 슬그머니 두고 가신 적도 많았다. 지나다니시며 무심한 듯 마늘쫑과 호박을 가져다주셨고 이제 막 타작한 서리태를 건네셨다. 그것이 마트에서 얼마에 팔리는지와 관계없이 모든 수확물은 귀하다. 더위와 추위에 맞서 올곧이 정성을 다해 땀으로 키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자르느라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내게 할머니가 내민 비닐봉지에는 음료수가 세 개 들어있었다. 마트에서 뭔가를 사 올 요량이면 오히려 내가 사드려야 할 터인데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다. 무엇인지 여쭤보니 예의 그 충청도 화법이 돌아왔다.

"그동안 도움만 받고 말도 없이 가면 서운하잖어."
"어디 가시는데요?"
"죽을 날 받아 놓고 왔어."


너무 놀라 무슨 말인지 짐작도 하기 어려웠다. 갑자기 무슨 불치병이라도 걸리신 것일까 싶어 차근차근 질문을 이어갔다. 공휴일이라 방문한 자녀와 함께 읍내에 가 영정사진을 찍고 오신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영정사진을 마치 사망선고로 받아들이신 듯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이제 석 달 남았다'라고 하셨다. 

인생이 무상한 듯 "기가 맥혀"라는 말만 되뇌는 어르신께 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몸이 안 아픈 곳이 없어 이제 갈 때도 되었다'는 이야기, '그동안 도움받은 게 많은데 말도 없이 가버리면 욕하지 않겠나 싶어 이거라도 들고 왔다'는 말이 이어졌다. 먹먹한 말과 회한에 잠긴 목소리, 순간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하고 마음은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길을 잃었다.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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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내민 비닐봉지에는 음료수가 세 개 들어있었다. ⓒ 조명신

 
그 부질없는 준비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기실 영정사진은 남은 자의 몫 아닌가. 사랑하는 이가 떠나고 나서 만들어도 될 일이다. 그런 것에 마음의 준비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헤집어 놓으면서까지 꼭 미리 준비해 두어야 할 일인지 의문이다. 

사진 한 장을 이용해 인간의 눈으로는 구분조차 어려운 딥페이크를 만들기도 하는 인공지능(AI) 시대 아닌가. 오래된 낡은 사진을 복원하거나 흑백을 컬러로 바꾸는 것은 오래전부터 가능했다. 이제는 초등학생도 가지고 다니는 스마트폰 속 사진 한 장이면 그럴듯한 영정 사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존재라는 이유로 면전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사회는 비정해 보인다. 그것을 '장수사진'이라고 부르거나 '영정사진을 미리 찍으면 오래 산다'고 회유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인생은 한 번이고 그 길은 처음이라 누구라도 두렵고 서툴기 마련이다. 연로하다고 다 준비가 되었거나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닐 듯하다.

추워서 힘들다시던 할머니는 자리를 떴고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인사에 나 역시 경황이 없어 어떻게 배웅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이 사라진 후 다시 엔진톱에 시동을 걸었다. 지축을 뒤흔들던 소리가 멀어지더니 마음속에 소용돌이가 일었다. 마당을 맴도는 할머니 말씀에 마음이 헛헛해졌고 길을 잃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난히 날이 추웠다.
#죽음 #영정사진 #시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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