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규홍 의병부대의 전적지인 서봉산 일대
박도
의병사에 금자탑을 세우다
1907년 전후 전라도 곳곳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났다. 더불어 의병을 가장한 도적들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안규홍이 머슴을 살고 있던 보성 법화마을에도 도적을 방비하기 위한 단체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에서 활동하던 안규홍은 국난을 당하자 평소 마음 속에 품어왔던 창의(倡義; 국난을 당하여 의병을 일으킴)의 길에 나섰다.
"보성군 우산에 사는 안씨의 집에 머슴으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십 년 동안 근간(부지런하고 성실히)하고, 매우 신실하기에 주인이 사랑하며, 이웃동네에까지 칭찬이 자자하더니 지난해 9월, 갑자기 주인을 하직하는지라 만류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가더니, 근처에 있는 머슴 일백여 명을 모집하여 연설하며 말하기를, '비록 우리가 남의 집 머슴살이지만 국민이 되기는 일반인데, 나랏일이 위급할 때를 당하여 농가에서 구차하게 살 것인가'하고, 의병을 일으켜 호남 남일(심남일)파와 합세하였다고 하더라." - <대한매일신보> 1909년 1월 9일 자 '머슴꾼 의병'(고어를 알기 쉽도록 현대어로 고쳤음)
그때 안규홍을 따르는 자가 까마귀 떼가 몰리듯 하였다. 그들 대부분 머슴이거나 가난한 농사꾼들로, 그들은 고작 호미나 괭이와 같은 농기구를 가졌을 뿐이었다. 그때까지도 유생들은 그들과 함께 창의하는 걸 수치로 알 정도였다. 유생들의 냉담한 반응에 재정 후원을 기대할 수 없어서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관동사람 강용언(姜龍彦 이명 姜性仁) 의병 부대가 강원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의 진압을 피해 전라도 순천 일대에서 활동 중이었는데, 안규홍을 기꺼이 맞아들여 부장(副將)에 임명하였다.
강용언 의병장에게는 토착 의병 안규홍의 가세가 현지 지리에 어두운 약점을 보완해 주고, 또 지역 농민들과의 관계도 원만히 해결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강용언 의병장은 주민의 재물을 탐하고 성격이 포악하였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일인데, 일도 하기 전에 재물을 탐하고 백성에게 포악한 짓만 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는가?"
안규홍은 강 의병장을 꾸짖었다. 하지만 강 의병장이 이를 듣지 않자 즉결 총살하였다. 강용언이 제거되자 비로소 군기가 바로 잡혔다. 안규홍은 여러 부하들의 추대로 마침내 의병장이 되었다.
안규홍은 서울에서 내려온 해산 군인 오주일(吳周一) 등 수십 명을 포섭하여 항일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곧 대장 안규홍을 비롯한 토착 농어민 출신은 지리에 밝고 지역 주민과 일정한 연고를 맺고 있었으며, 관동의병은 전투경험이 풍부하고, 오주일 등 해산 군인들은 전술 전략에 이론과 실제를 골고루 갖췄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