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문노동자종합지원센터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강순 조합원
문세경
김강순은 경기도 포천에서 나고 자랐다. 농사를 지어 네 명의 자식을 먹이고 가르치던 부모님 덕분에 틈틈이 농사일을 배웠다. 상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른 취업해서 돈을 벌고 싶었다. 당시에는 괜찮은 상업고등학교만 나와도 취업이 잘 되었으니까. 공부도 곧잘 했다.
학교 운동부에서 럭비를 했다. 운동을 하면서 친구들과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또래의 남자 고등학생들처럼 호기심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다녀와서 뒷골목(?) 선배들하고 어울렸다. 그의 말대로 "화려한 20대"를 보냈다.
"아는 형님이 생선 장사를 해보자고 해서 1년 정도 했어요. 쌍문동에서 구두닦이도 해봤고요(웃음). 생선 장사 할 때는 노량진에서 새벽에 물건을 떼서 장이 서는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고, 저녁 5시까지 떨이 장사를 했어요. 잠을 서너 시간밖에 못 잤어요. 몸이 견디질 못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만뒀어요. 구두닦이도 마찬가지로 선배들이 해보라고 해서…(웃음)"
화려한 20대를 보냈다면서 껄껄 웃는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났다. 생선을 팔고, 구두를 닦으면서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았을까, 하며 조마조마했다. 재미있는 무용담을 기다렸는데 다행히 들려줄만한 이야기는 없단다.
그 후, 2년 동안 택시를 몰았다. 1990년, 우이동에서 택시 완전 월급제 쟁취 집회에 참여할 때다. 너무 열심히 싸웠는지 연행되었다. 닭장차라는 걸 처음으로 타보았다. 그때 택시 노조가 있다는 걸 알았다. 노조 지부장으로 나가라는 걸 거절했다. 젊은 나이에 택시만 몰 수는 없었다. 출판사에 책을 배송하는 일도 했다. 그 다음으로 한 일이 교회 행정실 직원이었다. 10년을 일했다.
"교회일은 힘들었어요. 육체적으로 힘들다기 보다 근무 환경이 열악했어요. 급여가 많지도 않고요. 무엇보다 힘든 건, 토요일과 일요일에 출근하는 거였어요. 지금은 주 5일 근무지만 그때만 해도 다 주 6일씩 일했잖아요. 거기다 하루에 10시간, 12시간 일하는 곳도 많았죠. 주 40시간 일 하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교회 행정실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후, 배화 여대 총무과로 옮겨서 18년 동안 일했다. 그리고 작년 8월에 퇴직했다. 쉬지 않고 일을 한 셈이다. 그럼에도 김강순은 여전히 일이 하고 싶다고 한다. 퇴직한 지 1년도 안 됐는데 벌써 계약직 일자리를 구했다. 대학교 스쿨버스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풀타임으로 하는 일은 아니라서 시간적 여유가 있다. 하지만 오후에 시작해 밤늦게 끝나기 때문에 이음나눔유니온 대의원 활동을 제대로 못하는 것을 아쉬워한다.
더 일하고 싶다는 김강순의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