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집단행동이 이어지고 있는 지난 3월 27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 관계자가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벌써 두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보건의료위기 '심각' 단계의 중앙대책본부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는 이미 사의를 표했다. 정부와 대통령실도 총선 이후 재정비와 수습에 바쁜 상황이다. 그러나, 의료 공백은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환자들의 불편은 더 커질 수밖에 없고, 대학병원의 위기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전공의 수련 과정과 의대 학사 과정이 1년 동안 단절될 위기에 처해있다. 이를 막을 골든 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무기력하게 시간이 지나가 버리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해결하려 해도 되돌릴 수가 없다. 지금 당장 출구가 필요한 상황이다.
2000명의 과학
정부는 2000명이 과학적, 합리적인 결정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미래 수요 예측은 넓은 오차 범위를 갖는 통계적 추론의 영역이지, 하나의 정답을 구하는 방정식이 아니다. 의료 수요 예측에는 다양한 변수가 있고, 증원의 규모나 속도에도 여러 가능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현재의 의대 교육과 병원 수련 환경도 고려해야 한다. 따라서, 이처럼 급진적인 증원 규모가 과학적인 숫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정부는 2000명이라는 숫자에 매몰되지 않겠다며 의료계에 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를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나, 정부가 제시한 2000명 증원의 근거로 내세운 보고서의 연구자들조차 2000명 증원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이다. 따라서, 오히려 정부 주장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평행선을 그리는 가운데, 정부가 그나마 논의의 여지를 최소한으로 열었다고는 하나, 정상적인 논의를 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대학별 정원 배정 역시 합리적인 기준 없어
2000명은 현재 의대 정원의 65%에 해당하는 파격적인 수치이다. 게다가, 추가 정원이 모두 지방에 배정됐기 때문에 각 대학의 증원 규모는 파격 그 이상이다. 충북대는 무려 4배, 다른 지방 대학들도 대부분 2-3배 증원되었다. 이렇다 보니 충청/대전 지역의 의대 정원이 서울 전체 의대 정원을 넘어서는 기형적인 상황이 발생했다. 당장, 초중고나 대학의 어떤 학과도 1년 만에 정원을 4배로 늘려서 정상적인 교육이 가능할지를 생각해 보자. 이 지점에서 정부의 증원 결정이 과학적, 합리적이라는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게다가, 거점 국립대 의대 정원을 200명으로 '기계적으로' 통일한 것은 더욱 이해하기 어렵다. 정원이 49명인 충북대는 151명이 늘어서 200명이 되고, 부산대는 125명에서 75명이 늘어 200명, 전북대는 142명에서 58명이 늘어서 200명이 되는 식이다. 각 대학의 기존 규모, 지역 인구, 부속병원 규모가 다 다른데 정원을 모두 200명으로 맞춘 것을 과학적,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증원 규모뿐만 아니라, 대학별 정원 배정 과정 역시 합리적인 기준 없이 성급하게 이루어졌다고 밖에 볼 수 없다.
9전 9패의 왜곡된 신화
대통령 담화와 여러 언론에서 언급된 '역대 정부가 의료계에 9전 9패'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많은 의사들이 어리둥절해하고 있다. 어느 순간 언론에 갑자기 9전 9패라는 말이 등장할 뿐, 검색을 해 봐도 그 실체를 찾을 수가 없다. 의료계가 대규모 집단행동으로 정부와 갈등을 빚었던 건 2000년과 2020년 두 차례였으며, 특히 2000년에는 정부가 계획대로 의약분업을 시행하여 의지를 관철시켰었다. 오히려 의료계에서 반대했던 여러 제도들이 정부의 의지대로 시행된 적도 많았고, 그중에는 부작용만 남긴 채 사라진 의학전문대학원 제도, 폐교된 서남의대와 같은 부실의대 문제가 있다.
'9전 9패'의 근거를 찾기도 어렵지만, 이번 사태에서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이를 의료계와의 싸움으로 설정한 데 있다. 정부 관료들은 의대 정원 문제를 두고 흥정하듯 굴복하지 않겠다고 한다. 현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전문가들과 협의하는 것을 흥정이나 굴복이라고 폄훼한다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부가 추진하고자 하는 정책에 대해 이해당사자, 전문가, 심지어 야당과 협의하는 것은 일반적인 절차이며, 필요하다면 이미 결정된 정책도 보완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흥정이나 굴복으로 치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부가 의대 정원 문제를 의사들과의 싸움으로 설정하는 순간, 정부와 의료계는 합리적인 논의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비로소 공론의 장으로 나온 의대 증원 문제
정부가 의료계와 충분한 대화를 했다고 언급한 37번의 회의 내용 역시 실체가 명확하지 않다. 오히려, 28차례의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 정원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을 뿐이다. 복지부는 작년부터 500명, 1000명 등 의대 정원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올 때마다, '정해진 바 없다'는 말만 반복했으며, 의대 정원과 관련된 제대로 된 공청회도 개최하지 않았다.
이제서야 의대 정원 논의가 공론의 장으로 올라왔다. 이런 논의는 정책 결정 이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이루어졌어야 했으나, 안타깝게도 정부의 일방적인 발표 후에야 공론화되었다. 정책 발표 후에라도 정부와 의료계가 진작에 적극적인 논의를 시작했다면 좋았겠지만, 2000명이라는 자물쇠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이제 몇 주 안에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공통점을 찾고, 차이점은 일단 미뤄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