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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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에 눈을 가린 여인이 보인다. 이 여인은 시력을 잃은 걸까? 아니라면 왜 눈을 천으로 가렸을까?
2. 여인의 손에는 작은 악기가 들려있다. 어, 그런데 악기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
3. 여인은 몸을 굽혀 망가진 악기에 귀를 대고 있다. 어딘가 애절하고 절박해 보인다. 여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4. 여인이 앉아있는 둥그란 물체는 뭘까? 행성 같기도 하고, 거대한 바위 같기도 하다. 여인은 왜 이곳에 앉아 있는 걸까?
이 외에도 수많은 질문들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 질문을 하며 그림을 보셨는지?
자, 이제 답을 찾아볼 시간이다.
어딘가 어둡고 우울해 보이는 이 작품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희망(1886)>. 19세기 영국의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8~1904)의 작품이다. 화가 자신은 작품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지구본 위에 앉아있는 희망, 두 눈엔 붕대를 감은 채 줄이 하나만 남은 리라를 연주하는 것. 어떻게든 온 힘을 다해 작은 소리를 내서 음악을 들으려는 것."
심지어 이 작품이 화가가 노년에 얻은 딸을 잃은 직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을 알고나면, 감동은 두 배가 된다. 작품을 그리며 필사적으로 희망을 찾았을 노(老) 화가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 같아서다.
'포기하지 마. 망가진 악기에서도 반드시 음악 소리가 들려올 거야.'
고통을 먼저 겪어 본 사람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는 깊은 울림을 준다. 그래서 나 역시 이 작품을 볼 때마다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이렇게 천천히 질문을 하며 그림을 보고, 그 답을 찾다 보면 김춘수의 시처럼 '이름을 부를 때 나에게 와 꽃이 되듯', 내 마음에 들어와 울림과 의미를 남기는 그림이 되는 것 같다.
미학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에게, 이 기사가 답이 좀 되었을까?
한국은 미학을 학문으로 전공한 사람은 적을지 모르지만, 이미 일상에서 근사한 미학들을 발견하며 생활하고 있는 분들이 많아 보인다. 한국어가 쓰이는 여러 장면에서 나는 미학이라는 단어와 마주친다. 삶의 미학, 기다림의 미학, 비움의 미학 등등이 그것이다.
과연 삶에서, 기다림에서 또는 비움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똑같아 보이는 일상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갤러리로 변하는 마법.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길에 핀 꽃들 속에서, 우연히 들어 선 전시장에서 눈부신 아름다움과 만나는 하루가 되기를 기대하며.
마지막으로 알버트 아인슈타인(1879~1955)이 했다는 이 명언을 나누고 싶다.
'아름다움은 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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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두껍게 할 글쓰기를 꿈꿉니다. Matthew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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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미학 전공이야"하면 늘 받는 질문,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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