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도읍 망석리 수로에 걸쳐 있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윗돌. 이것이 완도군 고대해양사 인식부족의 현실이다.
완도신문
전남 완도 사수도 해역의 중요성 인식부족, 고대해양사 연구 부실, 이것이 완도문화의 현실이다. 선사시대 해양문화를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도는 내륙의 문화가 외해로 뻗어가는 기착지로서의 역할뿐이라고 학계는 보고하기도 한다.
선사시대의 많은 유적이 나왔어도, 고인돌 군락이 조사되고 선사유적이 입증되었어도, 완도의 모든 섬은 제주도로 가기 위한 기착지 역할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국립해양수산박물관을 유치한 완도군에 불명예스러운 딱지가 이미 붙어버렸다.
기착지만 된 완도의 바다
완도의 각 섬에 정착한 선사인류에서부터 완도의 해양역사는 시작됐고, 그들은 찬란한 해양문화를 꽃피우며 사수도 해역을 누비며 살고 있었다. 그 막강한 해양세력의 영향으로 청해진의 역사가 탄생하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국가가 형성되고 내륙의 문화가 중요시 된 시대부터는 제주도가 부각됐고, 그로인해 완도의 바다는 외해로 뻗어가는 기착지가 되어 버렸다.
섬이 척박한 삶이라고 누가 말하는가. 국가가 형성되고 섬사람들은 바다에서 생산한 토산물과 모든 자원을 내륙의 권력자에게 바쳐야했다. 전복, 미역, 황칠 등 모든 토산물을 그들에게 빼앗겼다. 일제 강점기에도 청산도는 고등어 파시로 활황을 이뤘지만, 주민들은 바다자원을 수탈당해 풍족한 삶을 누리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도의 바다가 척박했던 것은 아니다.
사수도 해역은 늘 풍족했고, 선사시대 섬 생활은 활기를 띄었다. 그들은 외해로 뻗어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가까이는 제주도와 교역하며 내륙의 세력과 연계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바다는 풍부한 자원을 그들에게 늘 내주었다. 선사시대 인류가 완도의 모든 섬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완도의 바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인돌 형태는 지역에 따라 그 형태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이것은 그 지역의 전통과 독자적인 문화의 영향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외형적 형태에 따라 북방식인 탁자형, 남방식의 기반형, 개석식, 위석식 4종류로 구분된다.
청산면에서 확인된 고인돌은 하부구조가 지하에 묻어 있어 명확한 구분이 어렵지만, 일부 고인돌에서 판석을 이용한 하부구조와 받침돌을 이용한 구조와 다양한 방식이 섞여있다. 기반식과 개석식의 혼용방식으로 이해된다.
군집을 이루고 있으며,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다수의 고인돌이 주변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선사시대 유적의 인식부족으로 돌담축조와 수로 덮개 등으로 사용되어 원래 위치에서 이동되거나 소실되고 훼손된 것이 많다. 완도읍 망석리 인근에도 수로에 걸쳐진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윗돌이 있는 것으로 보면 우리지역 향토사의 허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청산면 고인돌 유적조사를 지난 2022년에 다시 시행했지만, 현재 상태는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장기적으로 유적이 훼손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용역조사 보고 내용이다.
청산면에 위치한 고인돌은 현재까지 매장문화재 정밀학술조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현황파악이 어렵다. 국가 예산이 확보된 향후에 다시 시굴조사 할 때는 유적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보호구역을 설정하여 확장조사를 해야한다는 것이 연구기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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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인류의 섬 정착, 완도 바다가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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