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오두막안전과 위험의 경계를 스스로 판단하도록 한 설계
아멜리에최
놀이터 내부로 들어가려면 무조건 외나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외나무 다리의 위치가 꽤 높아서 조금의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와 같이 올라갔다. 균형을 잡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놀이터 안으로 들어가니 계단으로 각 층이 구분되어 있었고 가장 꼭대기 층에는 아주 긴 커브형 미끄럼틀이 있었다.
다른 층으로 내려가 흔들거리는 나무 다리를 건너면 다른 편으로 놀이터가 이어지는데 그곳에는 계단 대신 봉으로 각 층이 연결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익숙한 듯 봉을 타고 올랐다. 이곳에서도 지상으로 내려가려면 역시나 비정형적으로 놓여 있는 외나무 다리들을 통과해야 했다.
이 놀이터에는 성인인 나에게도 조금 겁이 나 선뜻 시도할 수 없었던 구역이 있었지만 그곳에서 노는 6~10세 남짓의 아이들은 거침이 없었다. 신나게 뛰고 조심스럽게 내려가며 모험을 만끽하는 모습이었다.
스웨덴의 놀이터에는 위험 요소가 조금씩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아이들의 자율성과 근력, 판단력을 높여주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자연스럽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여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모험심을 키워주는 교육방식이라고 했다. 덧붙이면 이런 스타일의 놀이터에서는 질서도 자연스럽게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서로가 위험해질 테니 말이다.
아이들의 공간을 '제한된 안전지대'로 한정하지 않고 안전과 위험의 경계를 스스로 판단하게 하여 경계를 확장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네덜란드에도 있는 모양이다. 그 교육 철학이 실현되는 현장을 암스테르담의 한 동물원에서 목격한 것이다. '저러다 다치면 크게 다칠 텐데' 나의 우려와 달리 그곳에 있는 동안 울거나 다친 아이는 없었고 모두가 흥분과 신체활동으로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물원'에서 '교육기관'으로
아르티스 동물원 홈페이지에는 1838년에 처음 지어진 동물원의 역사를 소개하며 최근 20년 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동물원'에서 '교육기관'으로 변모하고자 노력해 왔고 그 일환으로 동물과 식물의 공간을 확장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아르티스 동물원을 거니는 동안 다른 동물원에서 느꼈던 불편한 마음이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9세기 제국주의 아래에서는 '내가 아닌 모든 것들(=타자)'이 수집과 관찰, 분류의 대상이 되었고(인간도 예외없이), 그 연구의 결과는 정복과 지배의 정당성을 뒷받침 해왔다.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동물원은 박물관, 박람회와 더불어 타자를 전시하는 공간으로서 교육과 문화, 즉 이데올로기의 영역에서 제국주의를 선전하는 도구로 쓰였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약 200년이 지난 지금, 동물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어떤 역할을 담당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아르티스 동물원은 아주 똑똑하고 빠르게 시대적 요구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의 가능성과 영역을 확장하며 답을 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 안전과 모험, 같음과 다름, 공존과 경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말이다.
아르티스 동물원은 시각적 아름다움이 세계에 대한 인식, 사고, 철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게 해 주었다. 잘 만들어진 동물원은 아이는 물론이고 머리가 굳은 성인의 감각과 사고까지 환기시켜줄 수 있는, 모두를 위한 공간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암스테르담에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되어 가지만 아르티스 동물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그곳에서 느꼈던 충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교육기관으로 변모하려는 시도는 무척 성공적이었고, 당신들이 제공하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누릴 수 있는 네덜란드 사람들이 부럽다고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