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코 만쿠조 등이 쓰고 <광장>이란 제목으로 번역·출간된 책 표지 일부. 체코 프라하 구시가 광장이다.
이봉수
그리스 도시국가의 아고라(agora)는 '사다'(agorazo) 또는 '만나다'(ageirein)라는 동사와 어원이 같은데, 광장의 본래 의미를 잘 드러낸다. 물건을 사러 가거나 사람을 만나서 때로는 "물가가 왜 이리 올랐지" 같은 얘기를 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그에 반해 아테네의 언덕 위 아크로폴리스는 신전과 관공서가 들어선 종교와 정치의 중심지였다. 서울대도 관악산 기슭으로 이전한 뒤 도서관 앞 언덕 광장을 아크로폴리스라 부르며 시국집회 장소가 됐다. 나는 서울대 아크로폴리스는 엘리트의식이 깃든 잘못된 작명이라고 생각한다. 지배계층의 의식에 물들지 말고 진정한 생활정치의 공간인 아고라의 정신을 배웠더라면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리스의 민회도 아고라에서 열렸다.
광장의 역사는 권력자와 시민 사이에 뺏고 빼앗기는 광장 쟁탈전으로 점철됐다. 파리를 예로 들면 바스티유광장, 방돔광장, 콩코르드광장에서 시민과 권력자의 군대가 맞부딪혀 많은 피를 흘린 뒤 끝내 시민이 광장의 주인이 됐다. 권력과 이념의 광장으로 남아 군사퍼레이드가 벌어지는 곳으로는 모스크바 붉은광장, 베이징 천안문광장, 평양 김일성광장이 있다. 그 광장에는 권력의 이념적 표상으로 레닌과 마오쩌둥의 거대한 무덤 그리고 김일성-김정일의 거대한 초상화가 광장을 굽어본다.
유럽연합의 광장 연구 프로젝트 <유럽의 광장, 유럽을 위한 광장>을 주도한 건축가 프랑코 만쿠조는 공저서에서 '광장은 군중을 응집하는 용광로의 기능을 해왔다'며 '좋은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하는 곳'이라고 썼다.
시위문화의 발달과 권력의 광장공포증
한국의 광장은 어떤가? 우리는 사실 광장의 역사가 짧다. 1972년 처음 만들어 지금은 여의도공원으로 바뀐 5.16광장은 도시계획법상 광로(廣路)였다. 시위문화도 거리 시위에 익숙해 3.1만세운동도 4.19혁명도 모두 거리에서 이루어졌다.
6월민주항쟁도 정적 공간이 아니라 이동 공간인 거리에서 했기에 역동성을 살릴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기자로서 지금 경찰청에 해당하는 치안본부에 나가 전국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는데, 여러 시위대가 거리를 뛰어다니며 게릴라처럼 기습시위를 벌이자 경찰도 진압을 포기하는 분위기로 넘어갔다. 거리의 상점에서는 시위대를 숨겨주고 물을 떠 주는가 하면 '넥타이부대'가 사무실에서 나와 시위에 참여하기도 쉬웠다. 여의도 같은 데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더라면 여의도 다리를 차단해서 6월항쟁이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화문광장과 서울광장이 조성된 뒤에는 2002년 미군장갑차 여중생 압사 규탄 시위와 보수단체 친미 시위, 2004년 노무현 탄핵 거부 시위, 2008년 촛불 시위, 2016년 박근혜 탄핵 찬반 시위 등으로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했다. 이런 광장의 역사를 두려워 한 수구정권은 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싸는 등 광장공포증(agoraphobia)을 드러냈다.
이승만기념관과 박정희동상의 반역사성
최근 이승만기념관을 열린송현광장에, 박정희동상을 동대구역광장에 세우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 전개다. 붉은광장이나 천안문광장과 같은 이념의 광장을 핵심 공공장소에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경복궁 동쪽 노른자위 땅인 송현광장에 관해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승만기념관) 건립 장소로 가능성이 제일 높게 논의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이건희 미술관도 들어설 예정이어서 이승만기념관까지 건립되면 도심 녹지공간으로서 쓸모는 사라지고 독재권력과 경제권력의 두 상징 건물이 들어서는 셈이다. 4.19혁명 때 경무대로 향하던 청년학생들이 경찰의 일제사격으로 대거 숨진 곳이 경복궁 주변 길들인데 영령이 있다면 무어라 생각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