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바다출판사
이 책은 영국 산골짜기 진료소의 의사가 마을과 관계를 맺는 방식과 사례들, 지역의 의료 변천사, 코로나와 같은 대형 재난 상황에 대한 극복의 과정을 담담히 써 내려간다. 고성의 돌담과 골짜기의 안개, 노인들의 주름살이나 사춘기의 성 정체성 상담 등 이야기마다의 풍성한 묘사는 이 책이 단지 하나의 '사례 보고서'나 '교과서'가 아니라 지역사회와 의사의 '삶'에 관한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영국식 의료체계에 대한 찬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먼저 일러두고 싶다. 되려 주치의제도가 의도한 것에서 멀어지는 영국의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에 대한 자조적인 반성에 가깝다. 작가는 한 산골의 이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환자들의 의사에 대한 불신, 무너져가는 일차의료체계, 관료제와 의료계의 부조리, 진료 경험의 파편화, 모자란 예산과 의료자원에 대해서도 짚는다.
외국을 본받자는 철지난 사대주의적 주장을 하고싶지는 않다. 되려 그들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통해 우리는 우리대로 '무엇이 환자와 의사를 위해 최선일지' 치열하게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이 책이 그 여정의 첫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의술이라는 것이 앉아서 약을 나눠주거나 배를 가르고 다시 꿰매는 일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어요. 그야말로 예술이죠. 인간이라는 존재로 사는 것에 대해 훨씬 더 폭넓은 관념을 요구하는 기술입니다. 벽에 학위증을 걸어놓고 알약이나 나눠주는 일이 아닙니다. (…) 진료소에서는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야기 할 시간이 있었어요. 이것이 바로 시골 의원의 본질에 속합니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 말이에요." (94p)
지역의료의 개선은 과학적으로도 매우 효과적이다. 2021년 '영국일반의학저널'에 게재된 논문에 따르면, 의료 지속성이 사망률 감소로 이어진다는 내용이 있다. 같은 의사를 1년 봤을 때보다, 15년 이상 보았을 때 환자의 사망률은 25% 감소한다는 것. 또한 응급의료나 중환자의료에 이르기 전에 미리 환자의 건강을 관리하고, 이상 신호를 앞서 포착하면 진료비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지역의료의 수가를 일시적으로 올리거나, 의사 숫자를 늘려 지방으로 '낙수'시키겠다는 발상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지도 모르지만,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은 '의사가 환자의 삶의 파편을 이어붙여 전문가적 시점에서 관찰할 충분한 시간과 기회를 주는 방식'이어야 하고, '환자의 인생 궤적 속에 의사가 깊숙이 개입하고 의지할 수 있게 돕는 구조'여야만 한다.
환자의 피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본질적인 '건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한 사람의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행위마다 단편적으로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 개선, 경험 향상, 사회적 연대, 지속가능성 등을 포괄하는 '가치'를 높이는 뱡향에 '우대'가 제공되어야 한다.
획일적으로 그런 새로운 도전을 강요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단숨에 지금의 제도를 뒤엎자는 급진적인 주장은 더더욱 아니다. 지구 건너편의 동화 같지만 동화가 아닌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 읽고, 한국 지역의료의 방향성을 함께 논의하자는 것이다.
시민과 의사들이 함께 만들어 갈 지역의료의 내일
"의료 전문가인 동시에 긴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사연과 갖은 고생을 목도하고 거기에 공감해 주는 사람으로 사는 일은 어딘가 매력적이었다." (77p)
의사에게도 이러한 변화는 득이 된다. 책에서는 의사를 '모든 책꽂이에 매우 특별한 이야기들이 꽂혀 있는 아주 멋진 도서관을 뒤지는 사람'이라 말한다. 환자를 질병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책을 단지 종이와 잉크로 보는 태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흩어진 A4를 정신없이 수습하는 사무원보다는, 작은 도서관의 사서로 사는 것이 내게는 훨씬 견인력이 있다.
지금처럼 인간성이 사라진 채 파편화된 3분 진료실, 신뢰가 사라진 환자-의사 관계 속에 머무르고 싶으신 분들이 있다면 그렇게 하셔도 되겠다. 그러나 여기서 탈출할 '구명정'이 분명 있는데, 더 망설일 이유가 있는가.
시민분들께도 여쭙고 싶다. 진정 지금의 공장식 치료에 만족하시는가? 아플 때마다 우왕좌왕하며 낯선 의사를 찾아다니실텐가? 층수만 높은 병원들을 돌아다니다 시간을 허비하며 단면적인 진료만 받을 것인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질병이 아니라 진정 사람으로 대우받고 치료받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시민과 의사들이 함께 지역의료를 개선하는 길로 나서야만 한다.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 어느 시골 의사와 환자 이야기
폴리 몰랜드 (지은이), 이다희 (옮긴이), 리처드 베이커 (사진),
바다출판사,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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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골에서 일하는 일차, 방문, 응급 의료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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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진료' 너머, 삶에 밀착된 지역의료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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